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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Jan 31. 2024

뻔뻔한 사람이 되고픈 마음

자기 객관화에도 부작용이 있다



'모기도 낯짝이 있지'란 말이 있다. '뻔뻔하기가 양푼 밑구멍 같다'란 말과   염치없고 뻔 사람을 일컫는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에게 쓰는 '당당함'과 달리 '뻔뻔함'은 낯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간군상을 말한다. 뻔함은 곧잘  도와 행동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무심코 하는 말뿐 아니라 몸짓과 행동에서 나타난다.


자세히 보면 주위에 뻔뻔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 까닭을 무엇일까. 타고난 성향일지 모르나 세상에 태어나 난관에 부닥쳤을 때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던 나름의 돌파구나 방어기제로 쓰인 게 작인 경우가 있다. 뻔뻔함은 주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나 절박한 상인들에게서도 자주 보인다. 겸손이 미덕이듯 뻔뻔함도 경우에 따라 제대로만 쓴다면  능력이 될 수 있을까.


뻔뻔함에는 이러한 성향이 있다. 사자성어 "철면피한"은 쇠로 만든 두꺼운 낯가죽을 한 뻔뻔한 사람을 일컫는다. 주로 구김살 없이 태연한 성질의 사람을 나타낸다. 실수를 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유히 대처한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실수를  수 있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실수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보다 덜 부끄럽다. 실수는 반성을 통해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실수를 당혹감이 아닌 관대함과 자연스러움으로 여길 수 있는 배포 으로 봐서 번지르한 자신감과 기세로  가득 찬 사람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란 책 속의 한 인물이 떠오른다. 한 남성은 매일 아침 점호마다 머리에 물을 발라 빗고 눈을 부릅떠 생기 있어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수용자들의 상태가 곧 가스실로 실려가는 지표가 되곤 했다. 감시자들도 사람인지라 그들 중 가장 힘없고 포기한 눈빛을 보내온 사람들을 먼저 처형했다. 매일 아침 생과 사가 갈리는 고통스러운 시간마다 뻔뻔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수용자는 결국 살아남아 책을 쓰게 되었다.  


'네 주제에 분수를 알아야지' 한 때 주말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던 대사였다.  완벽한 자기 객관화에도 실은 부작용이 존재한다. 겸손이란 미명하에 자기 자신 뒤에 숨는 사람들이 있다. 충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때론 현실이란 한계를 긋고 가능성을 가두어 둔다. 순응과 체념한다고 끝이 아니다. 인생이란 거울 앞에서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자신을 북돋아야 한다. 삶은 자신과의 무수한 실패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양질전화라는 말이 있듯이 무수한 실패는 양질의 도약을 보장한다. 마주하는 부끄러운 실수들 앞에서 뻔뻔함은 계속 도전해 나아가는 무기가 되어준다.


'뻔뻔하다'는 건 판촉행사장 앞에 바람인형처럼 허구로 잔뜩 채워놓은 상태와도 같다.  "OFF" 버튼을 누르면 들어왔던 바람이 빠지며 인형의 형태는 사라질 테지만 모터가 계속 도는 한 춤도 추고 사람들을 부르는 손짓을 한다. 비록 허울 가득한 몸짓이더라도 그 부지런한 움직임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잔뜩 받아 바람인형의 신기술이 2세대 3세대를 거쳐 계속 진화하고 있다.  


삶은 기세이자 의지이다. 잘 살아내 보겠다는 자신감은 삶에 대한 스스로의 약속이자 사랑이다. 희망하는 미래의 모습과 현실 속의 괴리감으로 그 시작은 생각보다 미흡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변화를 바란다면 그것 이야말로 진정 뻔뻔함이다. 기운은 때론 한 사람을 북돋고 인생 전체를 일으킨다. 이제 "ON" 버튼을 누르고 몸속 구석구석에 자신감이란 바람을 채워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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