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을 말할 수 없는 마음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십팔~”
상대방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시곗바늘이 오전 7시를 가리켰다. 하루의 기운을 담는다는 이른 아침에 하필 처음들은 말이 ‘십팔’이라니. 상대방의 흐트러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보아 십팔 세가 아니라 삽십팔세로 보였다. 다행히 범퍼가 이미 들어가 있던 나는 무사히 후진 주차를 마치고 내리려던 차였다. 빼앗긴 주차 자리를 향한 그의 분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주차된 차량을 자신의 차로 막고 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따르면 먼저 차를 넣는 사람이 임자였다.
십 분 전이었다. 주차되어 있던 차에 주인 나타나서 짐을 싣고 네비를 찍는 동안 나는 그 앞에서 깜빡이를 켜고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자리가 났고 주차하려는 순간 ‘우웅~’ 혜성처럼 나타난 운전자가 나란히 연인처럼 범퍼를 밀어 넣었다. 결국 주차에 실패한 그는 차를 막고 시위에 돌입했던 것이다. 도저히 차에서 내릴 수 없었던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밀려드는 다른 차량의 클락션 소리에 그는 꼬리를 내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십 년 동안 막힌 변기가 뚫리듯 시원함이 몰려왔다.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가 쏟아낸 토사물로 나의 두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사회통념상 올바른 절차와 순서를 지키고도 욕을 먹는다는 건 굉장히 기이한 기분이들었다. 관자놀이가 뜨거워지던 그때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움과 공포가 섞여 온몸에서 저릿한 전기를 흘려보냈다. 기분이란 모호함이라는 특징이 있다. 욕을 뱉어내던 운전자에게도 순간 자신의 의사를 거절당했다는 모욕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내 분노와 함께 비벼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은 결국 익숙한 방식인 욕으로 전해졌으리라. 감정은 잘 조련된 종마처럼 주인에게 익숙한 패턴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 행복감을 더 자주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매일 기분은 바깥에서 오는 작은 다툼이나 언쟁에 영향을 받는다. 살면서 그런 사건을 마주하는 날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사실 감정이란 사람 안에서 더 자주 변한다. 그날 저녁 스펀지에 허브 비누를 문질러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싸움으로 인한 긴장감이 녹아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하고 수치스러웠던 감정들을 두 발에 담아 달리고 또 달려서인지 야채를 뭉근히 끓여낸 카레에 밥을 쓱쓱 비벼 그릇을 비웠다. 따뜻함이 뱃속에서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긴장과 피로를 누그러뜨렸다. 한 때 몸과 정신이 따로라 생각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제 그들의 말이 틀렸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정신활동의 일부인 기분은 몸의 생리적 경험들에 영향을 받는다. 가끔 우울할 때 떡볶이나 달달한 초콜릿이 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이라는 감정에는 형체가 없다. 온도가 제각각인 액체처럼 담기는 용기에 따라 모양도 달라진다. 그러한 기분을 순식간에 바꿀 순 없어도 알아차릴 순 있다. 아무런 의도 없는 하는 행동들에도 실은 기분이 영향을 미친다. 퇴근 후에 무심코 따는 맥주캔에는 심심함이, sns 스크린을 내리던 손가락에는 외로움이, 머리를 긁적이던 순간에는 당혹감이 숨겨져 있다. 살면서 쉴 새 없이 바뀌는 기분을 알아차리고 수용해 주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인생은 기분의 연속이며 꼭 녀석과 한바탕 숨바꼭질 같다.
빠른 기술의 발전과 경쟁 속에서 개인들의 기분은 종종 외면당해 왔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감정을 꼴깍 삼켜낼 줄 알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팽팽하게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분노가 억압된 시대를 만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자극적인 사건들로 뉴스를 쳐다보던 두 눈을 의심하게 한다.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감정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실은 감정이란 진화의 산물이다. 피해야 할 공포나 두려움은 선조들로부터 전해져온 기록이다. 즉 '살고자 하는' 생리적 도피반응이다. 떠오르는 모든 기분들을 편애하지 않고 정확히 알아차리려는 노력은 사고와 판단하는 힘을 가져다준다. 또한 질 좋은 음식과 운동 그리고 적정한 수면은 건강한 기운을 불러온다. 생각보다 기분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들은 꽤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에선 육식동물보다 초식동물이 훨씬 오래 산다고 한다. 육식동물에게 쫓기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초식동물들에겐 긴장감을 이완할 수 있는 부교감 신경이 발달해있다고 한다. 언제든 빨리 달릴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풀을 뜯으며 한가롭게 이완하며 사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변화 속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초식동물형 기분이 필요한 지금이다. 하루 중에도 여러 번 바뀌는 기분을 관찰하고 기록해본다면 어떨까.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알면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