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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Apr 04. 2023

새로운 질병이 발생했다

속눈썹 감모증


속눈썹 감모증


 현대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속눈썹 감모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형 제약 회사인 ‘엘러간'은 보톡스라는 것을 개발하여 여자들의 주름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준 장본인이다. 엘러간은 열띤 성화에 힘입어 여성들의 신체에 주름에 버금가는 심각한 질병이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늘고 여린 속눈썹이다. 엘러간은 고맙게도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라티세라는 바르는 약을 출시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얇은 속눈썹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 약을 평생동안 꾸준히 발라주기만 하면 마법같이 속눈썹이 ‘보기 좋은' 상태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이 보았을 때 이건 비단 엘러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체 미화' 분야에서는 많은 경우에 개선책이 먼저 만들어지고는 그에 맞추어 '결핍'이 등장하면서 빨리 고쳐야 한다는 외침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에게 이 모든 '결핍'들은 그리 호들갑 떨 필요가 없는 작은 '특징'들일 뿐이다.



속눈썹을 길러야하는 인류


 엘러간에서 처음 라티세를 출시한 것은 2008년이다. 출시 이래 약 15년이 지난 셈이다. 현생 인류와 같은 형태인 ‘호모 사피엔스' 조상이 출현한 시점이 약 60만 년 전이라고 하니, 인류 역사 전체를 24시간으로 놓고 본다면 여성이 긴 속눈썹을 ‘욕구'하게 된지 3초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루의 대부분을 수렵채집 사회에서 지내왔던 여성들에게 “속눈썹을 기르고 싶다"라는 팻말이 달린 유전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현대의 여성들이 그토록 속눈썹을 기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는 부족하다


 엘러간에 따르면 속눈썹이 가늘고 짧은 것은 질병이다. 무조건 고쳐야만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뭔지는 몰라도 일단 큰 일이 난다. 거기다가 유튜브 광고에 나오는 연예인은 하나같이 속눈썹이 길고 예쁘니 이게 내가 그 사람보다 부족해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들도 라티세를 사바르는 것 같고 마침 질병이라고도 했으니 이제 명분도 있다. 약을 산다.


 앨러간의 질병 정의는 속눈썹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평평한 이마, 낮은 코, 팔자주름, 작은 가슴과 골반 등 무궁무진하다. 하나를 다 뽑아먹으면 다시 다른 곳을 찾아내면 그만이다. 네가 알던 여태까지의 기준은 다 틀렸다고만 하면 된다. 공교롭게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고 네가 여태 알던 그 기준은 질병이니 치료해야한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이 새로운 기준이다. 여기에 맞추기만 하면 당신은 절세미인이다. 당신은 부족할 필요가 있다.



너는 부족할 필요가 없다


 런데 우리는 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속눈썹이 길고 짧은 게 애초부터 대수가 아니었다면, 여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속눈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유는 간단하다. 평가할 잣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에 못미치면 일단 난 기준 미달이다. 내가 그 지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가 가진 '결핍'에 대해 뭔가 스트레스를 느낀다면 적어도 하나는 의심해봐야 한다.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그 기준이 타당한지 말이다. 핍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결핍에 대해 애써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데 있다. 어쨌든 기준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너도 나도 사람인지라 각자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때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을 내 기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자신 기준에 대해 스스로를 설득할 만한 자신만의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 위에 쌓아올린 나만의 작은 성들은 사소한 파도에도 너무 쉽게 쓸려간다. 그리고 보통은 그렇게 무너져내린 성의 잔해를 보며 자신이 믿었던 그 타인을 탓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일단 내 성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땅을 잘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단해진 바닥 위에 나만의 표지판을 꽂아넣는 것이다. 요컨대, 내가 다른 지점까지 다가가려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 표지판을 내쪽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방법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기준이니까. 나는 내 속눈썹이 좋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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