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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May 04. 2024

9,580 km 장거리 연애

나의 준비 - 4

 항해를 하다 보면 가끔 맑은 하늘 저편 구석진 곳에 새까맣게 칠한 듯한 먹구름이 보인다. 맑게 갠 날씨 속에 원통형으로 둘러싸인 그 거뭇한 경계 안을 들어가면 갑자기 다른 세상인 것처럼 미친듯한 폭우가 쏟아진다. 항해사들은 보통 이렇게 좁은 곳에 일시적으로 강한 바람을 동반한 큰 호우가 내리는 것을 '스콜(squall)'이라 표현한다.


 내가 이전에 설명했던 이 스콜이라는 친구는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우리에게 절대 미리 통보하지 않는다. 갑자기,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날씨만 보면 전혀 비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화창한 날씨지만, 그저 어디선가 불현듯 자기 안에 조용한 소용돌이를 몰아치며 배를 향해 조용히 다가온다.



 나는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빈 종이에 내 마음을 정리해 써내려갔다. 차분하게 앉아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며 동기들은 나를 매우 정적이고 소심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동기들은 서로 이야기도 하며 친해지는 모습이었지만 나만큼은 거기서 똑 떨어져 혼자 앉아 뭔가를 계속 끄적이고 있었으니 자신들과 별로 친해지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나는 굉장히 차분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분주하고 번잡했다. 마치 부산 남포동의 자갈치 시장에 상인과 행인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모양새처럼, 내 마음 또한 이런 생각과 저런 생각들이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웅성웅성 거리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해보고자, 내 마음 속에서 조용히 교통 경찰이 나와서는 손으로 글을 쉴 틈 없이 끄적이며 얽힌 실타래를 풀어제끼고 있었다.



 9,580 km 장거리 커플


 당시 나는 첫 직장에 취직하기 전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여자친구는 내가 승선하기를 무려 8개월 반을 기다려주기도 하였고 당시 심적으로 많이 미성숙했던 나를 포용해주었던 좋은 친구였다. 내게는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해본 적도 없었던 정도로 감정적으로 상당히 무딘 사람이었다.


 이런 그였어도, 물론 내게 따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분명 오랜 기다림 끝에 나와의 만남을 통해 나름의 보상과 행복을 바랐을 것이다. 그것이 꼭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에게 뭔가를 해주기는 커녕 내 불안을 표출하면서 심적인 부담을 더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다가 당시 여자친구는 대학 졸업 직후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새로 취업한 로스 앤젤레스의 부동산 회사로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던 와중이었으므로, 여러 문제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꽤 버거웠을 터였다.


 내가 첫 휴가를 받은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그렇게 그는 캘리포니아로 떠났고, 나는 그런 그를 보내주고는 15일쯤 지나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훈련소에서 생활하며 여자친구와의 헤어짐이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는 태평양만치 멀어진 상태에서 나는 나대로 개인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당시 여자친구는 미국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랴 직장에 적응하랴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매우 다른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마음이 다했다


 참 많이 부족했던 나를 포용해주고 사랑해주었던 여자친구였지만, 오히려 내가 그를 담기에는 아직 내 그릇이 너무 부족했다. 무엇보다 당장 내 앞가림이 시급했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 내 내적 갈등이 점점 만남 중의 많은 시간에 걸쳐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막 수료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친구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이 전화가 단순한 축하나 안부의 전화가 아님을 말이다. 전화를 받았다. 수고했다며 간단한 안부의 말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말을 먼저 꺼낸 여자친구에게 참 미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누군가가 말을 해야했다면 그건 사실 나였어야 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것은 그 상황이 어떻든 반드시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력한 부담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로는 책임감 있는듯 보이지만 그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쉽사리 그러자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휴가기간동안 미국으로 놀러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잘 알았고, 여자친구 또한 한국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도 잘 알았지만 말이다.


 결국, 이런 내 이중적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했다. 그도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듯 보였다. 이런 나를 위해 그는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를 하며 내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진해 앞바다에 있는 야외 벤치. 자리에 앉아 영상통화를 킨 핸드폰 뒤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보였다. 이렇게 총대를 메고 서둘러 정리해준 여자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 당시의 헤어짐은 예상과는 달리 매우 덤덤하고 후련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이를 위해선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노을을 보며 다짐했다. 앞으로 있을 내 인생을 위해 당분간은 다른 무엇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내게 투자하기로 말이다. 이 헤어짐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이자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당시 여자친구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며 멀찍이서 조용히 응원하기로 했다. 서로 아무 말이 없어질 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의 앞날도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본 글은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의 4화로 작성된 글입니다.



1화) 당신의 항해에서 스콜을 만난다면

https://brunch.co.kr/@subakk96/74


2화) 나는 세상에서 없는 존재였다

https://brunch.co.kr/@subakk96/76


3화) 냄비가 흘러넘친다고요!

https://brunch.co.kr/@subakk96/77



 이런 회상을 올리는 것이 지금 내 반쪽인 여자친구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 헤어짐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앞으로의 이야기의 시작점이고 그 발전의 시간이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으므로 반드시 이 말을 꺼내야만 한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조심히 양해를 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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