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잃고 나면 보이는 것
아침부터 출근에 분주하게 움직인다. 세수하고, 이빨 닦고,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면서 바라보는 거울 속 내 모습. 왁스를 슥슥 발라 머리를 손질하고 맘에 드는 모습에 흡족하면, 그제야 출근을 서두르는 매일 아침마다의 모습.
유난히도 많은 도시의 쇼윈도들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무척이나 신경 쓰는 듯,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 수없이 들여다보는 우리의 외모. 자신의 외모에 만족 하나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 작은 차창에 비친 모습에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기 보이는 나의 겉모습이 달라진다면 난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러한 변화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변화라면 어떨까? 그렇더라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왁스를 바르고, 거리를 지나며 비치는 쇼윈도에 수없이 옷매무새를 고쳐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개인적 신앙에 비추어 누구도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이유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갖고 이 세상에 나와 무언가를 해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아침이다.
어느 때인가 ‘외모 지상주의’라는 말이 모든 뉴스와 기사에 넘쳐나던 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개성’이라는 것이 마치 그 반대말처럼 사람들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주기도 한 것 같다.
사람들의 관계는 늘 필요하고, 사회생활이라는 주제는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는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나의 자존감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방법들도 결국은 그런 사회생활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 삶의 방식이자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내내 찾고 있는 무언가 이기도 하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유난히도 인식하고 살아가다 보니, 내가 살아가는 건지 남을 위해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가 되는 시기가 있었고, 아직도 어느 것이 맞다 라는 것보다는 어제 보다 낫기 위한 오늘을 사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신경 쓰는 것, 다른 사람에 눈을 의식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들뜨기도, 좌절하기도 하는 것들은 결국 모두 내가 아침 욕실 거울 앞에서 쳐다보는 모습 때문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쇼윈도에 수없이 비춰보는 내 모습. 사람들의 ‘눈’에 의해 보이는 모습을 바꾸려고 하다 보니, 내 속에 나 답지 않은 무언가를 자꾸만 강요받게 되는 것 말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계속되는 주변의 관심이라는 이름의 그 시선 때문에 가슴 아파하기도, 괜한 내란(?)만 잔뜩 일어나고 말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켜야 하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게 함정이다. 뭔가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고, 남들과 다투기도 하고, 그렇게 경찰서에 가지 않을 만큼의 나쁜 짓(?)도 해가면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라보는 내 얼굴, 그리고 타인의 얼굴. 내 얼굴에만 신경 쓰면 그런 이유로 남에게 지탄을 받기도 하고, 남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봐도 ‘당신 얼굴’이나 보라고 비아냥 거림을 받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매일의 삶인 것 같다.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켜 사실 누가 아이들이 말하는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알아내는 건 사실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래도 내가 오늘 하루 삶을 살아가면서 아침 욕실 거울에 비치지 못한 내 마음의 소리를 얼마나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새로 다짐했는지 느껴질 때, 오늘 우리는 지켜할 것을 지킨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오늘 하루, 힘들고 지치고, 아침부터 영 맘에 들지 않는 헤어스타일로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어도, 오늘 지킬 수 있는 걸 무사히 간직하고 집에 돌아왔다면,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의 그 엉망인 헤어스타일조차 오늘 하루 온종일 빛났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