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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Jun 04. 2019

낙타상자 / 극공작소 마방진 / 고선웅

 점점 많은 이야기들을 연극이든 영화든 어떤 매체로라도 볼수록, 이야기는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제작진들한테도 말을 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연유에서 이 <낙타상자>라는 20세기 초 중국 이야기를 반드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는 연출자가 아니라 이 이야기가 하려고 하는 말을 내가 들은 대로 적어보면서, 그것이 정말로 우리한테 필요한 이야기인지 재고해보도록 하겠다.


 주인공의 이름은 상자이며, 인력거를 몰아 연명하는 사회 최하위 계층에 속한다. 폭력 성향이 있는 술주정뱅이 동료 인력거꾼 아저씨의 딸인 복자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착실하게 돈을 모아 자기 소유의 인력거를 구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어떤 나쁜 군인에게 인력거를 빼앗기고, 복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복자를 파는 바람에 복자까지 빼앗긴다. 여기서부터 인력거와 여성은 이 비극에서 남성 주인공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강조하게 될 소유와 상실의 주된 대상이 될 것임이 암시된다. 실제로, 이야기에서 상자는 두 명의 여자를 잃는 것처럼 그려지고 한 번은 새 인력거 자체를, 또 한 번은 인력거를 다시 마련하기 위해 모아둔 돈을 빼앗기면서 여자와 인력거는 대구를 이룬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상자는 인력거 회사 사장의 딸인 호호와 잠자리를 갖게 된다. 이쯤부터 상자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 없고 짜증 나는 캐릭터인지가 드러나는데, 대신에 우리는 호호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기는 한다. 내가 본 바로는, 호호와 상자는 술은 마셨지만 서로 합의하에 잠자리를 가졌고, 상대적으로 권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호호가 상자에게 술을 권하여 시작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강압이었다고 볼 여지를 어디서도 이야기가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에 상자가 마치 술을 마셔서 호호와 잠자리를 한 것처럼 그려지면서, 남성 주인공의 의식적 행위를 술로 핑계하려는 익숙한 전통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상자는 조선생이라는 착한 부자의 개인 인력거꾼이 되고, 잠자리 후 호호와 만나거나 이야기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호호는 자신을 피하는 상자를 찾아와 임신 사실을 알리고, 상자는 조금은 마지못해 호호의 결혼 계획에 동의한다. 상자는 결혼을 반대할 것이 분명한 호호의 아버지, 즉 인력거 회사 사장을 설득할 방법과 결혼 후의 계획 모두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혼 후 인력거를 팔아달라는 복자의 부탁에 대해서는 부인인 호호를 설득하여 인력거를 사들이는 뜬금없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한다. 호호가 복자에게 창녀라고 말하거나 처음에 알린 임신 사실이 거짓이었다는 것은 호호의 비도덕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런 면은 사장의 딸이라는 신분에서 인력거꾼의 아내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호호의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사기결혼을 당했음에도 특유의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새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가정을 꾸리는 '가부장'의 꿈에 행복해하는 상자의 모습은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난산으로 인해 호호와 아이 모두를 잃고 나서 단숨에 흑화되는 전개, 그리고 그 후 조선생의 도움에 의한 복자와의 새 출발에 대한 혼자만의 희망에 다시 밝아지는 모습은 상자라는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당혹스러움 그 자체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결국, 아버지에 의해 성매매촌으로 한번 더 팔려간 복자는 자살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상자의 슬픈 모습으로 이 연극은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에서 상자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비극의 희생양이 되는 것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비극 속에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최대의 피해자는 과연 상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는 호호와 복자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부장제와 가난의 이중고에 의해서 죽을 때, 이야기는 교묘하게 가부장제의 비극을 가난의 비극으로 덮으려고만 한다. 아니, 이야기는 등골이 낙타처럼 휠 정도의 가난의 비극 속에서조차 가부장제의 신화를 지키기 위해서 호호와 복자를 서둘러 죽여 무대 뒤로 보내버렸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죽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겨진 가부장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언젠가 교과서에서 본듯한 이 익숙한 이야기는, 가난 혹은 사회적 계급차에 대한 통찰이나 반성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가난과 사회적 혼란이라는 (가부장제 스스로가 자초했을) 위기에 처한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비극이라는 하나의 신화를 구축하려는 불어 터진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그토록 주체적이고 에너지 넘쳤던 호호가 임신 후 무대 뒤에서 출산의 고통만을 호소하고 사라져 버린 것을 기억하면, 그리고 그 이유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가부장의 현실적인 경제적 능력 부족인 것을 기억하면, 이 이야기는 여성을 비극을 위한 소품으로만 사용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경은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닮지도 않았고 지금의 시대에 던져줄 어떤 메시지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인정하자, 관객을 너무 우습게 만들지 말자. 사람이 직접 스스로를 희생하여 더 높은 계급의 다른 사람을 운반한다는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이 지금의 시대에는 없어져야 될 직업인 것처럼,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이제는 폐기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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