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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ug 12. 2019

숭배와 혐오, 혹은 숭배라는 혐오

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믿음의 힘

 숭배와 혐오는 동전의 양면인가? 정확한 비유는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숭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혐오의 대상이 필요해 보인다. 뭐,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떤 종교인들은 신을 믿기 위해서 악마의 존재 또한 믿으려 하고,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어느새 본받을 만한 신을 상상하고 그를 닮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자기 주변 사람들 중 일부를 악마로 지정하고 명명하는 데 더 힘쓰기도 한다. 그와 비슷하게, 그리고 그와 협력하여, 자본주의 숭배자들이 그들에게 방해되는 세력들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불합리한 제도들을 만들어내 왔는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는 바로 그만큼 어떤 여성성은 아름답지 않다고 혐오해왔기 때문에 혹은 여성성 자체를 폭력적으로 재단해왔기에 가능했다. 또 그와 비슷하게,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여성은 물론이고 그 숭배되는 남성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다른 남성들을 혐오하고 차별해옴으로써 가능했다. 자본주의적 경쟁 시스템에 대한 숭배는 그것의 공평성 자체가 허상이라는 사실 이전에, 대다수의 경쟁 탈락자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수의 소위 '성공한 사람'에 대한 숭배를 가능케 해왔다. 많은 숭배 집단들이 자신들의 혐오 행위들을 부인하긴 하지만, 사실 숭배는 혐오의 다른 버전일 뿐이기도 하다. 숭배는 그저 혐오의 다른 표현 방식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숭배는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행위들 중 일부의 의미를 세뇌와 신봉 같은 이름으로 왜곡하고 그 왜곡된 의미를 타자화하지만, 실은 숭배 자신이 그런 왜곡된 믿음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은 모르는데, 바로 그때 우리는 그것을 숭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와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독재정권이 불온서적이나 반동주의자들을 지정하여 어떻게 특정 사상을 혐오하고 심지어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까지 망가뜨려왔는지, 특정 기독교 세력들로 대표되기도 하는 호모포비아들이 동성애자들을 병에 걸린 것처럼 치료할 수 있다며 터무니없는 주장과 아집으로 어떻게 동성애 혐오를 조장해오고 있는지, 남성우월주의자들이 페미니즘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곡해하고 단순화시켜 바로 그 왜곡된 페미니즘을 프레임으로 하여 여성 혐오를 어떻게 계속 지속시켜오고 있는지 등을 보면, 모든 종류의 혐오주의자들은 바로 자기들이 이미 저지르고 있는 오류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 오명을 타자화해 특정 약자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전략에 중독되어 있기라도 한 듯이 보인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혐오주의들이 단순히 정치적 세력들에 의해서 정치공학적으로 이용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나는 어쨌든 그런 것이 가능한 것 또한 우리 모두 각자 안에 있을 어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숭배와 혐오의 모형 혹은 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정치를 힘(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하지만, 가만 보면 다른 종류의 힘을 믿는 사람들 간의 다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힘'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하며, '힘을 가진다' 혹은 '힘이 있다'라는 환상에 대한 믿음 혹은 집착 유무의 차이이기도 하고, 동시에 '힘이 없는 상태'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트라우마, 그리고 그로 인한 혐오 의식의 유무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일본의 아베 정부의 행태와 국내 극우 세력들의 언행들은 이 강함에 대한 숭배와 약함에 대한 혐오의 공식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우선, 2차 세계대전 패망 전의 제국주의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개헌을 목표로 하는 아베 정부는, 바로 '강함'이라는 신화에 대한 동경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 거짓 신화에 대한 믿음은 가히 종교적 숭배를 뛰어넘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적 과오는 부인되어야 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주전장>을 참고하자면, 그들 '일본인'들은 특별히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아"왔고 또 실제로 하지 않는다고 전제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역사적 사실은 그들 각료들의 믿음과 선언에 의해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거짓말이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며, 대신에 그들이 믿는 신화를 실현하는 데 방해되는 세력들 모두에게 거짓의 프레임을 씌우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는 국가에게만 그 거짓의 프레임을 씌우는데,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그들이 내세우는 프레임이 약소국들의 주장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혹은 강력해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내용에 상관없이 말이다. 일본의 파렴치한 내정간섭은 이렇게 '약함'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기에, 이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반인륜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단순히 두 국가 혹은 두 정부 간의 힘과 책략의 대결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정의 내리기 싸움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및 강제징용 피해자 등 아시아를 위주로 한 전 세계적 제국주의 피해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들을 인정받을만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그들(약자들)을 제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강대국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강자가 아니라면 인간 또한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공포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일본의 문제, 일본 정부라는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두고 볼 만한 문제이거나 다른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약 1세기 전에 시작되었던 제국주의적 반인륜 범죄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견제하고 억제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가 더 심각하게 느껴져야 할 이유는 역시나 국내에서 극우들이 열심히 제공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가 친일파라고 자신들을 광고라도 하는 듯한 그들의 과도하고 비상식적인 언행들을 단순히 보수 야당의 어떤 일시적인 정치적 전략이라거나 몇몇 유튜버들의 수익을 노린 노이즈 마케팅 정도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역시나 바로 그러한 정치적 상황 및 매체 노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약육강식이라는 유치한 법칙에 대한 신봉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것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경제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유리하고, 없는 자들이 저항의 몸짓을 할 때에는 게으름으로 비난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약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저질 교훈의 본보기로 삼는 사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일본과의 갈등 문제를 단순히 민족주의적 코드를 곁들인 애국 혹은 항일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우리가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극우들을 일제를 숭배하는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제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을 반논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혐오주의자들이라고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로 정확히 불러야 할 것이다. 그들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비판과 해석을 통해 그들의 행위에 대응하는 것은 우리 국가 및 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의 감정을 다스리려는 맥락 중 중요한 일부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사회에 인권과 다양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해나가 결국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하는 과정 속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종류의 맹목적 숭배는 '강함' 혹은 '강자'에 대한 숭배이지 않을까. 모든 종류의 혐오가 '약함' 혹은 '약자'에 대한 혐오인 것과 똑같이 말이다. 그래서 그 둘은 항상 같이 오는 것이다. 강한 것을 좇기 위해서는 약한 것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혹은 정파적 진영의 경계와 상관없는 하나의 더 큰 이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와 반대되는 이념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약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다양성의 보존과 증대 그리고 평화라는 목표로 무장한 이념 말이다. 그것들에 대한 믿음은 '강함'에 대한 숭배와는 다르게 옳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와 트라우마에 좀 먹히는 어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강함'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면 차라리 '힘'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 자체를, 우리가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더 넓혀가면서 그리고 더 낮게 내려가면서, 새롭게 재정립해나가는 과정을 이어나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혐오 조장이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기 좋은 수단이고 또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많이 그렇게 활용되어 왔으며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도구적 활용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 안의 뿌리 깊은 숭배와 혐오, 혹은 숭배라는 혐오다. 그래서 혐오 감정을 이용한 그러한 정치공학적 술수를 가리키고 지적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믿음이란 어떤 것을 보이지 않아도 안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안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니, 나는 우리가 그 믿음의 의미를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믿음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내가 나의 행동은 물론 믿음까지도 앞으로 계속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바꿔나가야만 한다고 믿을 때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자꾸만 보려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믿음은 무엇이 될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선택을 유보하는 한편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주고, 변화를 위한 행동의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런 믿음의 '힘'이 아닐까. 자신들 스스로가 피해자이고 또 피해자임을 직접 호소했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겪어왔음에도, 전 세계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나아가 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 피해자들까지와도 연대해오는 우리 할머니들의 활동들은 그러한 믿음의 힘의 훌륭한 본보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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