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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ug 01. 2023

다섯 번째 #3

"나를 떠나보내는 일"

 텍스트는 배우의 원천이다. 텍스트 없이는 어떤 배우도 없다. 텍스트란 이미 쓰인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란 일반적 의미로서의 '텍스트'와 '쓰인'이라는 말이 갖는, 어떤 기록된 문자 형태로서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이 문자의 형태이든 기록되지 않아 그저 휘발된 소리나 움직임이었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라는 부사다. 우리가 텍스트라는 단어를 배우의 연기와 연관 지으면서도 배우의 연기의 문제를 다시 텍스트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의미를 기록된 문자 형태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저 '이미 한 번 이상 시작되어 우리 앞에 있는 무엇'이라는 의미로 넓혀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 형태야 어떻든 간에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혹은 어떤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최소 1차적 행위 또는 행위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부여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텍스트는 그것을 마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번역하게끔, 그렇게 재차 새롭게 시작되게끔 자동적으로 요청한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에 대한 감각을 되뇌는 순간, 해석과 번역은 시작되고 새로운 의미로서의 재탄생이 시작된다. 배우가 텍스트에 대해 믿는 힘은 바로 그 부분이다. 텍스트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그것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해석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바꿔 말하게끔 주문한다. 그렇게 텍스트는 자신의 다음 텍스트를 부른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다음을 약속하기 위한 무수한 첫 번째 시작이다. 그러한 텍스트들은 서로에 대해 위계를 설계하거나 강요하지는 않기에, 언제나 이전의 것을 가리지 않고 옆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텍스트란 애초에 이미지, 언제든지 텍스트가 될 수 있는, 텍스트가 되길 기다리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결코 덧씌워지거나 서로가 서로를 가릴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휘발될 뿐이어서 두께 없는 평평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는 옆으로, 무한히 옆으로 미끄러져나가기만 한다. 텍스트를 어딘가에 기록된 문자라고만 이해한다면 이러한 휘발성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설령 문자 형식의 텍스트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읽히거나 기억될 때에만, 즉 음성으로서 혹은 시각적인 것에 대한 구현이나 상상으로서 신체 안으로든 밖으로든 발화될 때에만 텍스트일 수 있기에 그것의 본질은 휘발성이다. 즉 텍스트는 사실상 이미지에 대한 동사적 의미다. 그러므로 텍스트가 애초에 문자 형식이든 음성 형식이든 영상 형식이든 혹은 움직임 등의 신체적 형식이든, 어떤 텍스트 이후에는 결국 그러한 것들에 대한 '나'의 (재)발화의 이미지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발화되기 전, 연기되기 전의 텍스트 또한 본질적으로 (재)발화된 이미지, 적어도 그 텍스트를 쓴 사람에 의해서 한 번은 발화된 이미지, 그 텍스트가 참고한 다른 이미지들을 텍스트 삼아 연기된 결과물로서의 이미지, 즉 그 자신 앞에 있었던 또 다른 이미지-텍스트들에 대해 상상된(imaginé) 것의 행위적 결과물이다. 그러한 이미지-텍스트들은 언제나 그 자신으로서 시작되는 무엇인 것이고 그것을 통해 다른 무엇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수한 처음을, 무한한 시작을 약속할 뿐이다. 시간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이미지에 끝은 없다. 이미지는 그 자신의 무한한 휘발성 덕분에 언제나 남을 뿐이다. 이미지의 휘발성은 그것이 흔적도 없이 금방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소환하자마자 이미 휘발되고 있다는 말이며 다시 말해 원한다면 그것을 끝없이 소환할 수 있다는, 끝없이 (다시 그리고 새롭게) 기억하고 읽고 듣고 보고 행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텍스트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앞의 이미지들을 잔존시킬 수만 있다면, 아니, 우리가 그 이미지들 앞에서 잔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텍스트를 요구하는 새로운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텍스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배우가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텍스트는 지문이거나 대사고, 텍스트가 텍스트 앞의 모든 이들을 배우로 만드는 만큼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지-텍스트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는 이미지가 되고, 관객 앞에서 휘발되면서 텍스트로 삼아지면, 관객은 배우가 된다. 이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그저 모든 것이 이미지라고 말해 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언제나 휘발되는 이미지는 그 자신의 의미를 시시각각 바꾸기에, 이미지를 그저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그 무한한 휘발성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미지 앞에서,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무얼 결코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이미지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이미지와 텍스트를 우리의 인식과 행위 과정 속에서 찰나에 구분하려 하거나, 아니면 아예 이미지-텍스트 관계가 통합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모든 이미지가 배우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모든 이미지는 배우이고, 텍스트란 동사적 의미로서 그 배우의 연기이며, 그 이미지의 관객은 새로운 연기를 시작하는 배우-이미지가 된다. 예를 들면 쓰인 글로서의 텍스트 또한 그저 쓰이거나 연기된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연기를 하고 있는 일종의 배우라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혹여나 불분명할지라도 자신의 역할을 맡고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발화하고 있다. 이어지는 배우의 연기 또한 바로 그 텍스트를 번역하고 표현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그치지는 않는다. 배우의 연기는 또 다른 장면, 또 다른 연기, 또 다른 이미지로 이어지는데, 그때 그 배우의 연기가 이어지는 이미지들과의 관계에 의해 텍스트화되면서 계속되는 이미지들이 그에 반응하여 그것을 또 나름대로 번역하고 표현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몽타주 되기 때문이다. 즉 몽타주는 이미지들이 서로가 서로를 연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말하기이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행위와 존재 양식이 이미 그 자체로 말하기이고, 말하기의 본질이 실패라면, 이미지들의 상호 연기, 상호 몽타주 또한 일종의 말하기로서 실패의 운명을 거스를 순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몽타주들로 구성되는 영화는 더구나 프레임 안에서 온갖 방법의 말하기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보일 수 있고, 무엇이든 들릴 수 있다. 무엇이든 잘못 보일 수 있고, 무엇이든 잘못 들릴 수도 있다. 또한 무엇이든 보이지 않을 수 있고, 무엇이든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경우에도 영화는 바로 그렇게 보이고 있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영화는 말하기를, 말하기의 실패를 탐색하고 탐구하기에 적합한 말하기 양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쩌면 그러한 영화는 무엇보다 실패하기 위한 말하기 양식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애초에 실패한 시나리오를 텍스트 삼을 수도 있고, 그것을 토대로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실패의 연기를 배우와 함께 연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가 아닌 장면, 혹은 연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장면, 즉 실패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장면들을 그 뒤에 몽타주 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실패한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혹은 시나리오 속 내용인지 아닌지 모를 장면을 그 뒤에 몽타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 관객은 실패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이미지를 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관객과 함께 사유하고 말하고자 계속해서 시도한다. 영화와 관객의 몽타주 말하기 시도는 끝내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그것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벗어나거나 스스로 길을 잃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말하기일 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또한 영화는 시나리오북에 적힌 배우의 모호한 연기 노트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시나리오와 영화의 관계를 밖과 안 또는 전과 후의 관계에서 해방시키면서 다만 이미지-텍스트 관계를 암시하는, 즉 시나리오를 영화의 내재적 이미지로 문제삼는 몽타주를 할 수도 있다. 그 이미지는 배우의 실제 (실패한) 연기를 위한 노트인 것인가, 아니면 이 (실패하는) 영화에 대한 배우의 기록인 것인가, 아니면 시나리오의 연장인 것인가, 아니면 관객에게 주는 대사인 것인가. 무엇보다 영화는 바로 지금 보고 있는 컷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매게 되는, 그리고 그것을 정립하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가 컷들의 상호 연기의 상관관계를 몽타주하게 되는, 그리고 바로 그러한 관객의 시도를 하나의 연기로서 기대하며 배우로서의 관객에게 연속되는 이미지-텍스트를 제시하는 평면이다. 영화는 인과적이지 않고 부조리하지만 다만 연속적일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럼으로써 영화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이미지들 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이미지에는 끝이 없지만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믿고 거기에 의지하며 자신의 실패를 완성하거나 완수할 수는 없되 그저 끝마칠 수는 있다. 영화가 끝나도 이미지는 끝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연기가 익명의 관객에게 거는 기대인 것처럼, 영화란 이미지에 거는 기대, 실패를 무릅쓸 수 있는 기대다.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이어지는 이미지들에게 떠나보낸 후 그것을 돌이키거나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기대는 그저 떠나보내어질 뿐이다. 실패하는 이미지들에게도 그 기대는 가능할 것이다. 그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우리 또한 실패를 무릅쓰고, 연기하는 이미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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