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 남는 건 사람이다. 다녀온 지 3년이 넘은 여행지의 기억을 되짚어 여행 일기를 쓰려고 보니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다. (매년 목표에 '세계여행 일기 마무리'를 적었는데, 늘 새로 여행을 떠나느라 다녀온 여행 정리를 못했다. 코로나로 여행을 못 가니 올해야 말로 밀린 일기를 끝내리라.)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더더욱.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기 전, 남미사랑 카톡방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주일 예배 픽업해드립니다.' 여행 중 가급적 한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려 했기에 그 메시지가 반가웠다. 브라질에서 한인 교회에 버스 타고 물어물어 가느라 고생했던 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승한다고 질문하고 돌아다니던 그 지역도, 교회가 있던 지역도 썩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안전하다는 해변가 근처에서도 불안에 떨었으면서. 무튼 헤매지 않고 바로 갈 생각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일요일이 되자 약속된 시간에 호스텔 앞에 차 한 대가 섰다. 인사를 나누고 교회까지 가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장로님은 이민자 2세이신데, 주일이면 한국 여행자들을 자주 교회까지 태워다 주신다고 하셨다. 때로 자녀들에게 부탁하기도 신다고. 그들에게 이미 일상이라 토 달지 않고 대신 픽업을 나간다고 했다.
'이런 삶을 사시는 분도 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내게 "고맙다"라고 인사를 건네셨다. 고마워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한참 전이라 정확하게 뭐라고 하셨는지는 흐릿해졌지만 대략 "픽업한다고 하면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와준 것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긴장해야만 하는 여행지인 남미에서 남의 친절을 받아들이기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뒤돌아서고 나서야 타인의 친절에 감사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며 친절을 받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염치없지만 예배를 마치고 한인촌에서 떡볶이와 김치볶음밥을 얻어먹었다. 게다가 다음 목적지인 산뗄모 시장까지 차를 얻어 탔다. 가는 동안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봐야 할 곳 리스트까지 받았다. 심지어 저녁에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하고 싶은데 다른 일정이 있어 어렵다고 아쉬워하기까지 하셨다.
여행을 하는 내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했는데, 장로님을 뵌 뒤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옹색해지지 말고 다른 이에게 베풀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질 것. 얼굴 주름 펴느라 보톡스 맞는 데 열중하지 말고 마음에 구김이 없이 살 것.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될 것. 언어 공부는 꾸준히. 나이 들어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것. 몸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건강도 외모 변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더 빨리 나빠지지는 않도록 늘 관리할 것. 환경을 생각해 모두는 아니더라도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를 리스트로 만들어 실천하며 살 것.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고민할 것. 늘 뒤돌아보고 반성할 것. 당시 쓴 여행 일기에는 참 여러 가지 이야기가 쓰여 있었는데, 몇 가지나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 장로님을 한 번 뵌 적이 있다. 예배를 다녀온 뒤에도 (단체 메시지이나) 종종 카톡으로 안부를 전하거나 선교 기도문 등을 보내셔서 연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한국에 방문하게 됐으니 시간이 되면 얼굴 한번 보자는 메시지가 왔다. 이름 없는 모임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 장로님께 도움받은 사람들 모임'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장로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을 거다. 그날 모인 7~8명 사람들의 사연이 워낙 강력했다. 현지에서 오래 연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여행자였다. 자전거 여행하다 넘어져 다친 채 공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한국 사람이냐'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 데려온 사람도, 심지어 몇 주씩 집에서 먹고 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다. 예배 픽업으로 한 번 만난 나는 기억의 순위에서 저 뒤로 밀릴 수밖에. 그래도 다시 만나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날도 그분은 그 자리에 나와 준 게 오히려 고맙다고 하셨지만.
땅고의 나라
'부에노스아이레스=탱고'라고 할 정도로 여행자에겐 탱고와 관련된 뭐라도 해야만 하는 도시다. 탱고 공연을 관람하는 건 기본이고, 탱고 수업을 듣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탱고 필터로 거리를 걸어서인지, 최고의 관광상품을 강조하기 위해 거리 가득 탱고가 있어서인지. 거리를 걸을 때면 자꾸 탱고와 관련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점에서도, 길바닥에서도, 시장에서도.
라보카(La Boca) 지역은 탱고 발상지라 불린다. 당연히 이 도시에서 꼭 들러야 하는 곳 중 하나다. 상상 속 이 지역은 탱고 음악이 거리에 흐르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탱고를 추는 그런 곳이었다. 스페인 어느 도시를 여행할 때, 광장에서 사람들이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 깊어 '탱고의 발상지'란 이곳도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기대를 했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추운 날 평일의 라보카는 한산하기만 했다. 탱고의 흔적이라곤 옷을 차려 입고 관광객과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어주는 댄서들의 호객행위뿐이었다. (솔직히 그들이 댄서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도착한 지 15분쯤 흘렀을 때 '갈까?'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만약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진짜 그대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리에 앉아 라보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슬쩍 구경하며 지나치려는데 "Korea?"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밥장 알아?"라고 물었다. 가끔 들어가 보던 블로거라 귀가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이 EBS에 나왔다며 밥장이 여기 왔을 때 서로를 그려주었다고 했다. (밥장님은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를 몰랐다면 나는 그냥 지나쳐갔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파일 하나를 꺼내 증거물(?)들을 보여줬다. 그리곤 종이 하나를 가져오더니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선물을 주겠다면서. 한글로 이름을 적어 건네니 쓱쓱 탱고 추는 한쌍의 커플을 금세 완성해주었다. 한국을 좋아해 선물로 준다는 말과 함께. 종이 한 장에 라보카가 달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