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릴로체-산마르틴-푸콘
칼라파테에서 만난 J 언니에게 '우수아이아'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 여행이라 더 추운 '세상의 끝'까지 가볼 생각이 없어 넣지 않았던 여행지다. J언니는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온 슬픔을 두고 오는 곳이라 꼭 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피투게더>라니! 왜 그 영화에 나온 곳이란 걸 미리 떠올리지 못했을까. 우수아이아에 가야겠다는 마음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예약된 비행기 일정을 바꿀 없었다. 미리 비행기 티켓을 사놓지 않아 버스로 이동하느라 고생했던 터라, 부지런을 떨었는데 이렇게 아쉬움을 남길 줄이야. 대신 내가 다녀온 이후 남미에 가는 친구들에게 꼭 우수아이아에서 등대 엽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비행기 편 때문에 가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예매를 해놓지 않고 버스로 이동하려 했다면 26시간 버스(리우데자네이루-이과수폭포) 악몽 2탄을 찍을 뻔했다. 엘찰텐에서 함께 산을 올랐던 Y는 버스로 이동했는데, 폭설로 굽이굽이 돌아가느라 된통 고생했단 얘길 들었다.
물소리만으로도 힐링, 바릴로체
여유롭게 도착한 '남미의 스위스' 바릴로체에선 하루 종일 여유를 즐겼다. 숙소가 완벽해 나갈 의지를 못 느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사도 모임에 갔다 추천받은 곳인데, 호스텔이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5성급이었다! 추위에 시달리다 온 터라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은 더더욱 나가지 말라고 나를 붙잡았다. 책도 보고 밀린 일기도 쓰고. 배가 고파 못 견딜 즈음이 돼서야 호스텔을 나섰다.
호스텔이 좋으니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단 풍경을 바라보며 먹고 싶어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갔다. 파스타 재료 사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른 풍경을 만나 발이 묶였다. 의자에 앉아서 한참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 그리고 개와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을 구경했다. 돌멩이를 물가로 던지면 개가 물에 들어가 주워왔다. (똑같은 돌멩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가고 고요해진 뒤 물 가까이 다가갔다. 돌멩이를 둥글게 다듬으며 찰랑이는 물소리가 좋아 한참 동안 '물멍'을 했다.
먹부림, 산마르틴
원래는 바릴로체에서 푸콘으로 바로 넘어가려고 했다. 버스로 8시간이면 가깝지(?) 생각하며. 그런데 바릴로체 호스텔에서 만난 이들이 산마르틴을 거쳐 푸콘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기에, 덥석 따라가기로 했다.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7개의 호수화 설산, 산허리에 걸린 구름, 잔잔한 호수 위 반영된 산세까지. 졸다 풍경을 구경하다 하며 지루한지 모르고 금세 산마르틴에 도착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간 도시는 처음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익숙한지 앱을 확인하고 후보지 몇 곳을 골라 돌아다니며 가격을 묻고 흥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두세 곳 돌아다닌 끝에 하루 묵어갈 숙소에 짐을 풀었다. 비수기인 작은 마을, 숙소에 여행객은 우리뿐. J씨가 닭볶음탕 양념이 있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 숙소는 한국이 됐다. 우리는 닭볶음탕 재료를 사러 바로 마트로 향했다.
저녁엔 닭볶음탕 그리고 콘소메 양념을 넣은 닭요리로 한국을 만끽했다. 다음날엔 남은 닭볶음탕에 볶음밥을, 남은 콘소메 국물엔 라비올리를 깻잎, 멸치 통조림과 함께 야무지게 먹었다. 여행을 하며 나눔 받은 통조림인데 아끼고 아끼다 한식 파티에 아낌없이 꺼내놓았다. 저녁엔 소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파스타까지 만들었다. 후식으론 바나나 팬케이크까지! 재료 사고 먹고 치우고 쉬고, 재료 사고 먹고 치우고 하니 산마르틴에서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먹느라 음식 사진도 없네....?)
진짜 노천온천, 푸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마그마'를 보겠단 일념에 푸콘에 왔다. 화산 트레킹의 악명(?)은 익히 들었다. 액티비티 꽤나 한다는 사람들도 화산 트레킹은 힘들단 후기를 많이 보았다. 그만큼 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지만. 하지만 날씨가 안 받쳐줬다. 잔뜩 흐려 화산 트레킹은 불가. 대신 뭘 할까 하다 온천에 가기로 했다. 제대로 힐링이다.
마을버스 같은 작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천을 제안한 게 나라 가는 내내 계속 미안했다. 비가 그쳤으면 했는데 영 그럴 기미를 안 보였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이 날씨에 '야외' 온천을 하러 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는데, 방명록에 두 줄이 이미 쓰여 있어 "우리 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웃어젖혔다.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천으로 뛰어들었다. 뜨끈한 탕에 들어가니 비로소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몸은 따뜻하고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시원. 노천 온천은 여행 갔을 때도 가봤지만 이런 곳은 없었다. 간이 탈의실만 세워져 있을 뿐. 온천 주변이며 탕 아래 바닥이며 자연 그대로 돌밭이었다. 주위는 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옆에는 차가운 시내가 흘렀다. 냉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가 없는 이유. 다른 손님까지 없으니 자연인이 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