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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27. 2024

수고했어, 이젠 쉬어도 돼.

직장생활 30년이 되던 해, 나는 휴직을 결심했다. 이젠 정말 쉬어야 한다고 내 몸이, 내 마음이 보내는 시그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최소한 1년 이상은 쉬어보자는 마음으로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한편으로는 휴직하는 동안에 정년 퇴임 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찾아보기 위함도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시작한 직장 생활, 큰 딸과 작은 딸 출산 휴가 60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쉬고, 재충전하는 시간으로 지내보자는 생각이 우선이지만. 



휴직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큰 사고가 났다. 부엌에서 거실을 지나 앞 베란다로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바쁘게 뛰어가다가 그만 거실에 놓아둔 폼롤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왼쪽 어깨를 높이 50센터 정도 되는 나지막한 TV 장식장에 세게 부딪혔고, 너무 아파서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재택근무 하는 큰 딸, 온라인 강의를 듣던 작은딸이 '쿵' 하는 소리와 나의 '악' 하는 신음에 놀라 뛰 나오면서 119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급하게 말했다. 나는 팔이 빠지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그 자리에 쓰러진 채 한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침대에 누워 냉찜질을 밤새 했다. 크게 타박상을 입은 것이겠지 하면서. 

다음 날 아침이 되니, 통증은 좀 가라앉은 것 같은데, 왼손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왼팔 팔꿈치, 왼쪽 바깥 허벅지에는 크게 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뼈에 이상은 없다고 하면서 MRI를 찍어 보자고 했다. MRI 검사는 그다음 날 오전에 했고, 판독 결과 어깨 관절 연골이 찢어졌다고 수술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심한 타박상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수술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7살 때 다리뼈에 금이 가서 깁스했었던 기억, 두 딸을 제왕 절계 수술로 낳았던 경험 이외에는 다쳐서 수술하고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수술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더블 체크가 필요해서 주변에 어깨수술 전문 정형외과 의사를 알고 있을 만한 지인들을 생각해 봤다. 대학 동기 중에 손윗동서가 정형외과 의사라고 얼핏 들었던 것 같아서 동기한테 연락했다. 흔쾌히 그 친구가 동서분한테 연락해서 오늘 쉬는 날이지만 병원에 있으니 가서 진료를 받아 보라고 했다. 나는 MRI 사본을 갖고, 35분 남짓 버스를 타고 그 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료를 받았다. MRI를 보고 나서는 어깨 연골이 7센티 정도 찢어져서 봉합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명은 어깨관절 와순 봉합 수술.  입원은 4일 정도, 회복하는 데는 4~6주, 그 이후에 재활 치료는 최소 2주 이상 필요하다는 소견이었다. 지인 찬스여서인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재활 치료까지 생각하면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대학 동기 동서가 운영하는 병원이지만 규모도 크고, 그 의사분에 대한 신뢰가 들어서 그 병원에서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일 바로 입원하고, 다음 날 수술을 하자고 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 밖에서 잠시 앉아서 미팅, 모임 일정을 보면서 조정을 하려고 했으나, 여러 건의 약속이라 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팔과 어깨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해서, 팔걸이를 하고는 1주일 후에 수술을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하기 하루 전날 아침, 입원을 위해 수건, 속옷, 세면도구, 슬리퍼, 휴지, 충전기 등을 챙기는 데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전신 마취를 하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 수술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 회복되기까지 최소 2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니, 호기롭게 세웠던 계획을 미루어 두어야 하는 속상한 마음이 한꺼번에 들었다. 

입원 가방을 도트 백에 컴팩트하게 챙겨서, 왼쪽 팔은 팔걸이를 하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 창가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병원에 입원 수속을 밟고, 수술을 위한 검사를 진행하고 병실로 올라갔다. 배정받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환자복을 차마 입지 못하고, 병원 여기저기를 한두 시간 가량 돌아다녔다. 병원을 소개해 준 대학 친구가 본인도 항암치료로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술 전에 얼굴 한번 본다고 병원으로 방문해 주었다. 친구와의 유쾌한 토크로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와서 주섬주섬 환자복을 입으니 정말 환자가 된 것 같았다. 셀카를 찍어 보니 영락없이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저녁 10시가 넘어서까지 공동 병실의 TV는 계속 틀어져 있고, 환자, 간병인, 보호자와의 대화 소리는 끊임없이 들리고, 간호사는 거의 시간마다 병실에 오는 것 같았다. 병실에서 첫날을 혼자 보내면서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얕은 잠을 잤다.

수술 당일날 새벽 5시에 잠이 깼다. 수술하면 샤워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샤워장으로 가서 한 손으로 낑낑거리며 간신히 머리도 감고, 샤워도 간단히 했다. 미처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병실에 왔는데, 간호사가 링거를 꽂았다. 링거줄을 달고 다니려고 하니 정말 환자가 된 것 같았다.


오전 10시경에 남편이 병원으로 왔다. 입원하기 며칠 전에는 코로나 시국이기도 하고, 수술 당일에 보호자가 반드시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의사 말에 씩씩하게 혼자 병원에 있겠다고 했다. 입원 날짜가 다가올수록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고, 수술 당일에는 당신이 와 주면 좋겠다고 남편한테 말을 했다. 몇 년 전에 남편 코 수술할 때는 아내인 내가 당연히 간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휴가를 내서 간병을 해 주었다. 아내가 아프면 남편이 먼저 나서서 간병을 해 준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남편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몰라서 그런 거겠지 하면서 서운함을 다독였다.


1시간 반을 예상했던 수술은 회복실에 나오기까지 3시가량이 걸렸다. 담당 의사의 수술 결과에 대한 피드백도 듣지 못하고 병실로 이동했다. 무통 주사와 진통제가 투약되고 있는데도 저녁이 되니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진통제를 추가로 투약해 달라고 하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아파하는 나를 보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저녁 11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 내내 통증이 계속되었고, 아침 6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수술 다음 날은 작은 딸이 보호자로 와 주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면 통증이 많이 덜 해졌다. 작은 딸과 나란히 침대에 앉아 잠을 자기도 하고, 대학 생활, 친구 이야기를 하니 통증이 조금이나마 잊히는 것 같았다. 


수술 이틀째 날은 혼자 있기로 한 날이었다. 식반을 반납하기 위해 옆 환자의 보호자한테 부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혼자 지낼 만했다. 오전 11시경, 여동생이 방문해 주었다. 오늘은 언니 혼자 있는다고 해서 걱정이 돼서 왔다고 하면서. 2시간이나 지하철을 타고 와야 하는데, 그 먼 길을 기꺼이 와 주었다. 깜짝 방문이라 너무 놀랐고 고마웠다. 

여동생은 작년에 친정엄마가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하실 때도 너무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잘 해줘서 나를 감동하게 했고, 고마웠다.


입원 5일 차에 퇴원을 했다. 남편이 와 주어서 퇴원 수속을 하고 집으로 왔다. 오자마자 병원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바로 잠이 들었다. 낮잠인데도 거의 5시간을 자고 눈을 떠 보니,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약속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남편도 없었다. 혼자 주섬주섬 식사를 챙겨 먹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반깁스 같은 팔걸이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저녁 9시가 훌쩍 넘어서 술에 취한 채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친구와 당구치고, 술을 마셨다고 하면서. 너무도 서운했다. 급하고 중요한 일도 아닌데 하필 아내가 퇴원할 날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랬다고 했다. 남편이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 



어깨를 다쳐보니, 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혼자 머리를 감을 수 없어서, 가족들이 머리를 감겨 주고, 드라이어를 해 주어야 했다. 설거지도 할 수 없어서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칼질이 쉽지 않아서 밀키트나, 배달해서 식사를 해결하는 횟수도 많이 늘었다. 잠을 잘 때도 똑바로 누워서 자야 해서 깊은 잠을 잘 수 없고, 키보드를 잠시는 괜찮은데, 오랫동안 칠 수 없었다. 산책하고 나면 다치기 전보다 세 배정도는 더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주 단위, 일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 한 시간이라도 아껴 쓰면서 살았던 나의 삶을 방식을 할 수 없게 되니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 어깨가 온전히 나을 수 있게 여기에만 우선 집중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다. 


다치고 한 달이 지나니, 가족들도 이젠 알아서 나를 도와주고 있다. 다치기 전에는 혼자 했던 많은 것들을 이젠 가족들과 같이하고 있고, 가족들이 없었으면 순탄하게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다치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마도 매일 골프 연습하고, 일주일에 2~3번은 필라테스하고, 주말에는 등산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제주도로 장기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고,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면서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무언가를 해야 하하는 것처럼 약속을 잡아서 바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다치고 나서는 운동이나 야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거실에 있는 몬스테라, 난초, 자스민 화분에 자꾸 눈이 가고, 식물들을 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새순이 나는 것 같더니, 잎이 커지고, 초록색이 진해지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주방 식탁에 앉아서 두 딸을 가만히 보고 있는 시간이 생겼다. 큰 딸은 일을 하면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가볍게 춤도 추면서 재미있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작은 딸은 그림을 그리면서 같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1년을 같이 살고 있는 애완견 두부는 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잔다. 나이가 드니 숨소리도 전보다는 거칠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늘 곁에 있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집중하게 되니 새롭게 보이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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