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26
나는 “ㅇㅇㅇ 사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안 돼”라고 대답하면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아이였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하는 모든 부탁은 머릿속으로 수어번 곱씹은 뒤에 가부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반면에 동생은 거절 받아도 다음 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던 녀석이라 일단은 “안 돼”부터 했다고. 결국엔 누가 가장 원하는 바를 많이 얻었을까. 아마도 동생이었을 것 같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걔는 ‘안 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으니 받지 못한 것들만 생각이 나겠지만.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남에게 웬만한 부탁을 하지 않는다. 이 습성은 남의 손을 빌리느니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게 전에는 내 능력을 과신하고 상대의 속도를 답답해하기 때문인 줄 믿었는데, 요즘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나는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부탁을 거절받는 게 나를 향한 거절 같아서. 그래서 남에게 내 일을 쉽게 부탁하지 않고, 누군가 내게 “ㅇㅇㅇ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음에도 일단 받아들인 뒤에 울면서 그 일을 해냈던 게 아닐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종종 나를 다그쳤다.
살면서 이렇게 돈이 궁한 적이 있던가. 엄마의 판단 미스로 생긴 구멍은 이제 내 상황까지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중이다. 나는 대출을 추가로 받았고, 노후를 위해 묻어두었던 주식을 팔았다. 그럼에도 내 몫의 카드빚은 매달 차근차근 다가오는 중이고. 이제는 점심에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수어 번 생각하고, 서점에서 신간을 구매하는 대신 도서관에서 구간을 살핀다. 지금의 나에겐 17000원도 너무 큰 돈이라서. 엄마는 2년만 지나면 상황이 괜찮아질 거라는데, 이런 일을 2년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2년 내에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심하게 답답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이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어쩌니”라는 말로 나를 위로한다. 글쎄, 어쩌겠는가. 엄마에게 미움이나 원망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는데.
치과에 갔다. 6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어릴 때 방치된 내 이는 자꾸만 망가진다. 맞벌이인 엄마는 자식의 이를 살필 생각을 못했고, 어린 나는 그냥 신나게 초콜릿을 먹었기에 내 이는 이미 20여 년 전에 꽤 많은 치아에 신경치료를 감행했다. 이로써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하나둘 수명을 다하고 있는 중이고.
얼마 전부터 한 치아에 혀가 닿을 때마다 ‘뾰족하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경치료한 이 하나가 이미 삭았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나 돈 없는데’였고. ‘돈 없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엄마가 미워진다. 나는 내가 미움받지 않으려 엄마를 미워하는 길을 택한 것 같다. 엄마가 미울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는 자꾸만 달린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 같기도 해서. 자꾸만 증폭되는 불안과 억울함이 나를 계속 밖으로 나가게 한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독립된 가정이 되고 싶다고 꾸준히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각자 온전히 서 있길 바랐다. 과거에는 이 마음이 신경쓰고 싶지 않은 나의 이기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엄마가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나에게서 독립했으면 싶은 바람의 다른 말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