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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

by 아나스타시아

“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독립된 가정으로보지 않죠?”


이런 의문을 건네는 나에게 의사는 말했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이지은 님이 엄마가 독립하지 못한 상태로 요구하는 것들에 왜 무력한가. 비난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결국에는 그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엄마로부터 독립했는가.”


‘무력하다’는 건 ‘왜 그의 말에 속절없이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의 다른 말이다. 왜 나는 엄마의 요구에 그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행동하는가. 비상금이나 여유자금을 빌려주었다거나, 내가 수백 억 자산가라 엄마가 요구하는 돈쯤은 용돈 수준인 것도 아니고, 어째서 빚을 내서까지 그분의 요구에 응하는가. 그러고 나서 정작 나는 내 카드값을 갚기 어려워 리볼빙을 고민하는가. 결국 ‘엄마가 나를 이렇게 불쌍하게 만들었다’며 원망하는가.


가만 보니 이건 내 생각 패턴이었다. 나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거절하는 순간 부탁한 그보다 더 미안해져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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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다만 이건 내가 호의를 베푼 상대가 나를 우습게 생각해서, 호구로 봐서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큰 부담을 지면서까지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지 상대는 전혀 캐치하지 못해서일 확률이 크다. 어쩌면 “책상 위에 있는 펜 한 번만 쓸게” “나 현금이 없어서 그러는데 천 원만 빌려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자꾸 부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늘 ‘왜 이렇게까지 무리하고 있는데 내 노력을 몰라주지?’ 하며 서운해하고 있었다. 말한 적도 없으면서 알아주길 바랐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꽤 무리해서 엄마의 요구에 응했지만, 이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린 적이 없다. 내 비상금에 노후대비로 사놓은 주식까지 다 털어 엄마에게 보내고, 나는 불안감에 주말마다 외주를 수주해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는 모른다. 그러면서 왜 모를까, 어떻게 딸의 마음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싶어 서운해했던 것이다. 나도 엄마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모르면서 말이다.


심지어 나는 엄마에게 돈을 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남들은 자식 스무 살까지 장성시키는 데 2억 원은 든다던데, 나도 그런 걸로 치면 되지.’ 이 말을 의사에게 했더니 “엄마는 자식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게, 나는 왜 엄마를 있지도 않은 내 자식과 동급으로 취급했을까. 나 또한 엄마를 온전한 객체로 보지 않았다는 생각의 증거가 이게 아닐까.


이제는 ‘왜 엄마는 나에게서 독립하지 않지?’가 아니라 ‘왜 나는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하지?’를 봐야 한다. 우리의 유착관계를 끊는 것만이 서로가 행복해지는, 아니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는 길이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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