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3)
여자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는 왜 항상 같은 내용의 변주 같을까.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마지막 영화들이 운 좋게도 마음에 쏙 들었다. 어디에 있든 우리가 같은 것을 억울해하고 같은 곳을 꿈꾸고 같은 이유로 서로를 염려한다는 걸 다시 확인한 듯했다. 하미나의 짧은 글을 읽었을 때 같은 기분.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더니, 진짜구나.
그러나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여성은 어떤 국가든 갈 수 있고,
또 어떤 국가의 여성이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타라 루이제 베트비어,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 추천사 (하미나)
브리기트 바이히, 2023
너무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상영 직후 왓챠에 들어가니 혹평 일색이라 당황했다. 공교롭게도 전원 남자들이었다ㅎㅎ 다들 전주에서 뭘 기대했길래 폭탄이니 책임전가니 하며 악평을 남겼는지... 더 폭탄 같은 그야말로 ‘영화제 영화’밖에 못되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ㅋㅋ
자기와 다른 존재에 이입할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남성 씨네필들은 자주 여성인물만 등장하는 이런 영화에 쉬이 지루해하고 괴로워한다던 말이 생각난다. 혹은 북한이 주적이니 뭐니 하는 군대식 이데올로기 정신교육의 여파에, 영화 속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어려워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고.
<…넷, 다섯, 여섯…>에는 양영희 감독의 서슬퍼런 평양 시리즈와 비교되는 재미가 있다. 완전히 외부인이지만 그덕에 더 극적으로 따스한 라포를 쌓은 백인 감독들의 ‘승인된’ 영화기 때문이다. 반면 양영희의 <굿바이 평양> 등은 반만 외부인인 재일조선 3세대의 사적 역사에서 우러나온 비판의식과 한이 가득 담기는 바람에 비승인되고 입국 거부된 영화.
전작 <…하나, 둘, 셋…> 단체상영 허가를 받고, 잘 차려입은 중산층 여성들을 모아두고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우쭐대는 극영화회 남단장(차숙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 계급일) 인터뷰를 딴 것에서 이 영화 뒤편의 프로덕션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이 모든 허가를 받아냈을지 그려진다. 아마 감독은 네 명의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공인된 목표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걸린 코호트 민속지로서의 기능도 출중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지 않고 관찰자에 머무르는 부분에서 도리어 세심한 우려가 엿보인다. 개인의 꿈, 가정의 기능마저도 모조리 위대하신 수령 동지를 기쁘게 하겠다는 상위의 목표에 잡아먹히고 마는 현실을 비출 때마다 카메라는 2초 정도 짧은 지연을 둔다. 그때 카메라의 침묵이 가장 강력한 의사표현이 된다. 그런 인터뷰에서만 네 선수들이 어쩐지 자신없이 외워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기계처럼 내뱉는다 느낀다면 착각일까. 수시로 침을 삼키고, 눈을 굴리고, 고개를 내린 채 카메라가 아니라 바닥을 쳐다보는 비언어적 표현들. 어쩌면 그런 인터뷰들은 찍히는 자와 찍는 자 간의 암묵적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억압적 체제의 민족주의 국가에서 그냥 국민이 아니라 ‘여성’ 국민이 된다는 일의 의미 탐색도 차차 확고해진다. 아이를 낳으면 분명 짐이 될 터니 커리어의 시작점에 한번씩 임신중단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향옥과 미애. ‘세대주’라는 남편에 대한 호명, 남편 얘기를 할 때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야한다는 언니들의 경고.
북한 최초의 여성 연출자로서 그 의미로나 그가 만든 사료로나 역사적으로 단독 탐구될 가치가 있는 인물이 분명한 차숙 감독을 두고 “아무래도 여자가 만들어서 박력감이나 구성력이 좀 떨어지니까” 제가 도와줬다며 거들먹거리는 단장이나 그 옆에서 아주 잠시 굳어지는 차숙의 표정. 그럼에도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선택해 업계의 ‘유일한’ 여성이 되게 만들어준 김정일에 무한한 감사를 품고 있고, 은퇴 후 자체 제작할 다음 작품의 주제로 수령에 대한 인민의 경애를 담겠다고 말한다.
유일한 여성이 된다는 것. 유리도 아닌 콘크리트 절벽을 머리 위에 두고 살며 남자가 은혜로이 내려준 사다리에 승은 입은 듯 기뻐한다는 것. 다음 여자를 위한 사다리를 내가 준비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나뿐이라는 것.
그런 사회에서 향옥이 결국 북한 최초의 월드컵 심판으로 2015년 출전해 자기 꿈을 이룬다. ‘친구’ 유디트와 브리기트와 다시 만나, 환희와 해방감을 느끼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냥 감동과 기쁨만을 느낄 순 없다. 그가 돌아갈 곳의 운명을 알아 한편 애잔해진다.
라미애, 리향옥, 리정희, 진별희 그리고 차숙의 이름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
이사벨 에르게라, 2023
꿈을 꾸지 못하는 스페인 여성이 인도에서 발견한 고전 소설 <술타나의 꿈>에서 시작되는 얘기. 술타나는 술탄+여성형 어미로 만든 이름일 테다. 꿈을 꾸다가 여왕과 여성 과학자들이 다스리고 남자들은 전쟁을 피해 규방에 자진해서 유폐된 아마조네스 ‘레이디랜드’에 가닿는 책 속의 술타나, 여성이 학교에 가거나 남자 없이 길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금지됐던 1905년 벵골에서 혁명적 책을 쓴 작가이자 교육자 베굼 로케야 호세인, 120년 후 그 책을 읽게 된 스페인의 이네즈 세 여성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그림체로 (!) 전개된다.
소설 속 술타나의 꿈은 단지 기폭제일 뿐, 베굼 로케야와의 정신적 동질성을 감지하고 그의 자취를 찾아 스페인, 로마, 인도를 종횡무진 오가는 이네즈의 여정이 더 자세히 그려진다. 놀라운 작화를 탄탄히 잡아주는 건 (어쩌면 이사벨 감독의 페르소나일) 이네즈의 심경에 대한 지적 묘사인데, 내면을 찬찬히 그리고 정교히 훑어가는 언어들의 합은 에세이로 봐도 수작에 속할 것이다.
인도에 있는 남성 연인과의 매우 불안정한 situationship, 스페인의 아트 큐레이터인 폴과의 우정보다 약간 더 묘하고 애틋한 감정, 가족을 떠났지만 열정으로 삶을 산화하며 즐거운 자극이 되어주는 영화감독 아버지와 휠체어에 타기 시작한 해양생물학자 어머니. 보고 싶지 않아야 할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자신의 유약함에 고뇌하던 이네즈는 베굼 로케야의 생가나 그가 글을 썼던 ‘과부들의 마을’을 찾아가는 여행 중 길거리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던 인도 여성 수다냐를 만난다.
베굼 로케야 호세인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두 번 세웠다. 열린 마음의 판사였던 남편을 사별로 떠나보낸 동네에서, 남편이 남긴 유산으로 학교를 연 첫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수도에서 두번째 학교를 연 그는 ‘교육받은 여성들은 (나처럼)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다’고 소녀들의 가족을 설득하고, 외간 남자들이 득시글대는 길거리를 마구 배회하게 할 수 없다는 걱정에는 검은 옷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감싸 수레에 태워 등교시킨다(즉 어떤 ‘보수적’ 관습은 그 시절에는 그 나름의 파훼, 역전, 반역성이었단 점을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시킨다).
그의 노력이 20세기 초 인도 여성들에게 제한된 자유나마 선사했지만, 이네즈가 목격한 2020년대의 인도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거나 더 퇴보해있다. 남편을 여의거나 이혼한 여자들의 ‘튀는’ 행동이 용납되지 않고 같은 여자들이 더 앞장서 비난하는 모습. 이네즈의 '채집'을 반기지 않는, 우호적이지 않은 과부들 사이에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해 슬퍼할 즈음 이네즈는 ‘수다냐의 꿈’을 듣게 되고 동행이 되어준 그와 로맨스적 관계로 진입한다.
그렇게 줄곧 그를 괴롭힌 인도 남자친구와의 파괴적 관계에서 벗어나 수다냐의 옆자리에 누운 이네즈의 편안한 얼굴은, 술타나의 레이디랜드 - 베굼 로케야의 계몽주의적 교육 - 이네즈의 레즈비어니즘을 한 갈퀴로 엮어가며 여성이 진정 안정에 이를 수 있는 파격적 방식을 제안한다.
양주연, 2024
- 시놉시스 -
어느 겨울밤, 주연은 아빠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아빠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주연에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그날 40년 전 자살한 고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주연은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된 고모의 흔적을 추적한다. 주연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져 온 여성들을 기억하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고모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간다.
- 리뷰 -
양주연 감독의 <양양>은 가족사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양 씨 집 안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가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한 만큼, 가족 안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다. 그런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누나가 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40년 전에 사라진 고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1975년, 대학교 4학년이었던 감독의 고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할머니가 남겨 놓은 고모의 사진을 발견한 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고모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사라진 고모의 자리’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던 ‘양주연 감독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진수)
※ 스포일러 주의
고모 양지영의 짧은 일생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추적하던 영화는 돌연 그가 ‘남자친구 집에서 죽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기록말살형을 받았단 진실을 찾아낸다. 그의 죽음은 사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인, 페미사이드였을 수 있음이 강력히 암시된다. 그렇게 가장 개인적이었던 이야기가 가장 정치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기록되지 않고 잡히지 않는 가해자를 찾거나 2차가해자 혹은 조부모에 대한 원망을 더 내보이기보단, 가족 내에서의 복권, 말소된 관계의 회복을 지향하는 마무리를 맺는다(바로 그래서 이번 전국제 한국 영화 중 가장 인기 있고 호평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ㅎ 사람들은 대체로 시끄러움과 아름다움을 대응항에 두고, 끈질긴 것보다 평화로운 것을 사랑한다). 고모 양지영의 이름은 주연의 제안 하에 선산의 가족 묘비에 함께 적힌다.
사실상 현대 한국은 남자 때문에 죽은 여자들, 그 유족과 친구들, 죽을 뻔한 여자들의 원념으로 세운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나라에서 전형적인 장녀로 살아오며 순조롭게 결혼출산의 길로 접어든 이가 가족이 수치로 여겨온 일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까발리는 자기고백적 탐구만큼은 존경스럽다. 능숙한 기록활동가로서의 태도나 신혼 집 책장에 꽂힌 책들의 목록, 국가기관에 찾아가 고모가 사망한 해의 수기 수사일지를 모조리 훑는 행동력에서 미루어볼 수 있는 이이의 지난 경험 역시 대단할 것이다. 광주민주항쟁, 쪽방촌, 대학 청소노동의 자리에 있었던 여성들을 주로 담아왔다는 이력에서 나를 포함한 동시대 여성들이 그에게 어떤 것을 빚지고 있는지도 즉각 알게 된다. 평생 남동생을 더 아끼고 높이 평가했던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고모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도록 설득하는 부분도 이게 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한 걸음이었을까 싶어 뭉클했다.
그러나 결말에선 감독님의 아이가 생겼다고 부모님께 밝히며(…) 결국 너무나 한국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는데…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 나와 똑같은 걸 보고 배우고 겪었으면서, 내 남자와 이룬 내 가족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유지하는 여자들이 나는 때때로 불가해하고 두렵다. 우리가 서로를 동지라고 생각하려던 기획은 결국 일부 실패했음을 직감한다. 그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 같다. ‘화목한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지워진, 차별받고 상처받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새기며 그 화목함에 (제도 안으로부터의) 균열을 내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밖에.
고모 양지영 양이 대학시절 읽던 시집을 적어두지 않아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아직 못 알아냈다. ‘나를 결박하지 않고 자유를 주고, 내면의 빼앗긴 남성적 목소리를 돌려주어야만 그 자유를 들고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의… 결박이 제목에 들어가는 아주 옛날 타고르 시선집 같은 거였는데… 그것이 고인 양지영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강렬한 소원이었음을 기억한다. 남성 시인의 남성 화자는 자신의 ‘남성’을 돌려달라 고했지만, 여자들에겐 그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