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보다 강렬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밖의 발언들이 있다. 신작 <아노라>를 포함해 지난 10년 간 낸 작품 다섯 편이 모두 성 산업 근처를 맴돌고 있는 션 베이커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분명 특이점을 갖는다. 그는 <아노라>의 프리미어 시사에서 “생계를 위해 자기 몸을 어떻게 쓸지는 성노동자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며, 직업이자 생계수단인 성노동이 차별받거나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성노동은 노동인가? 격렬한 찬반 논쟁 한가운데에 놓인 ‘성노동’의 주된 쟁점은 먼저 그 노동이 재화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전적으로 타자의 욕구에 기반한다는 데에 자리한다. 찾는 이가 없으면 파는 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는 단순하다. 그런데 그 욕구는 성노동 종사자에게만 정확히 타겟팅되는 것이 아니라서, 성노동 종사자와 유사한 사회문화적 표지 - 성별, 외모, 인종, 나이 -를 가졌을 뿐인 타인의 물화에 기여하기도, 특정 집단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 ‘노동’은 특정한 기술보단 (성매매에 적합한 방식으로) 예쁘고 건강한 신체만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련도가 쌓이기에(혹은, 그렇다고 믿어지기에) 보수도 증가하는 여타의 노동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역방향의 ‘프리미엄’ 가치를 갖기도 한다. 직업여성이 아닌 ‘일반적인’ ‘여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여성 혹은 그러한 장소(‘오피’)가 선호되거나, 성매매 여성이 어리고 성 경험이 없을수록 값이 비싸게 매겨진다는 현장이 이를 방증한다.
성매매 비범죄화를 논하기 이전 용어의 정립만을 두고도 도통 의견이 모이지 않는 동안, ‘이미’ 존재하는 성산업 종사자들의 삶은 자극적인 사례집 속의 증거로 소진되고 곧 잊힌다. 한 편에는 더 이상의 성매매 인구 유입을 막기 위한 신속한 전면 중단 즉 탈성매매와 구매자 처벌주의를 논하는 이들이 있다면, 한 편에는 지금 여기에 내버려진 이들의 역사나 처우나 소망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 둘의 궁극적 목적이 다르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아마 정석적이고 최선인 방법은 1) 성판매자 개개인에게 낙인을 찍지 않고 2) 탈성매매 그다음의 생을 함께 고민하고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탈성매매 - 대체로 성매매 집결지의 깔끔한 철거를 동반한 - 이후 탈성매매 인구의 경제활동과 기존의 관계들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잘 모른다/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일단 낙인을 찍지 않는 첫 단계부터 대체로 삐그덕댄다. 성매매의 ‘자발성’이 성립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자발적’ 성판매자 개개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편의점과 마트, 전단지 돌리기와 판촉, 청소와 식당과 물류 일처럼 ‘건전한’ 파트타임 일자리가 숱하게 많은데 왜 그 대신 성매매를 택했냐고 묻는 건 성판매 여성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탓하는 기존의 문법과 다름이 없어지는 오류다. 노동함에 있어 한정된 가용 시간, 자원 그리고 부과된 신용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경제활동인구 공통의 전략은 욕망보다도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에게 부과한 정언명령에 더 가까운데도 그렇다.
<레이디 크레딧>의 저자 김주희가 말했듯 “오늘날 성매매 여성들이 쉼 없는 성노동을 통해 부채를 상환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라는 신자유주의적 도덕 명령과 분리되지 않는다”. 암묵적 승인과 동조, 때로는 인신매매를 동반해가며 성매매 집결지가 없어지지 않도록 관리해 온 주체는 이제 정부만이 아니다. 성매매에 일단 진입하면 빚더미를 안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아닌가?). (허구적) 신용 기반의 금융 제도는 성매매 여성들의 신체와 동료 여성의 빚을 담보로 하는 마이킹 대출 등 전용 상품을 '합법적으로' 운영하며 그들 목줄을 쥔다.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적 신체로 물화된 여성은 성산업에 진입하는 즉시 업소나 고리대금업자부터 셋방 임대인과 인테리어 업자, 지정된 성형외과나 화장품 업체, 업소 매니저까지 체인화되어 극도로 체계화된 ‘부채의 전략’ 위에 올라타게 된다.
김주희에 따르면 성매매 외의 다른 직업을 겪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성들은 1년에 일수를 3천만원이나 찍을 수 있었던 자신의 ‘노동력’에 종종 프라이드를 느끼고 ‘언제든 그 정도 돈은 또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이때 부채는 단순한 빚이 아니라 자신이 업소 안팎의 채무자들과 쌓은 신뢰관계의 증빙, 성실한 태도의 증빙, 안정적인 벌이의 증빙이다. 나이와 경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노동자의 유망성을 구분 짓는 지표가 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이제 와 다른 노동으로 그만한 '신뢰'를 취득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즉 탈성매매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쉽게 돈 버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창녀 개인의 게으름이나 두려움을 맹비난하는 것만으로는("사람들 다 그러고 산다", "쿠팡을 가라") 그들을 끌어내기에 역부족이다.
나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몸 파는 일을 애초에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근거는 ‘나도’ 기초수급자였지만 성노동을 하지 않고 죽을 둥 살 둥 살아왔다는 극소수의 에피소드, 또는 ‘나는’ 같은 상황에 처할 리 없다는 안정적 낙관이다. 후자는 돈 벌기는 더 어렵고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자리를 선택하지 못할 만한 숱한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 탓이기도 할 테다.
<레이디 크레딧>은 강남의 '등급별' 성매매 업소 대기실마다 짬을 내어 과제 리포트를 쓰는 ‘진짜 대학생’들이 있었다는 증언, 2차 없는 토킹바를 몇 달 더 다니면 학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 철저한 계산을 하고 ‘노동’을 마저 수행해 원하던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이의 사례를 싣는다. 모자란 학비나 집세, 가족의 생계부양과 수술비와 약값까지. ‘뻔한’ 사정은 하고많아 동정을 구하지도 못할 때. 고착화된 빈곤 속에 발생한 극한의 상황에서 자기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최대한 적은 시간 일해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구 자체를 탓할 수 있을까? 성노동의 성립 자체에 여전히 불복하는, 반성매매 담론에(만) 동의해 온 나조차도 이 질문에는 멈칫거리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저강도(라고 할 수도 없지만) 고임금인 일자리를 택해서 자기를 위한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시간을 갖겠다고 결정한다면, 자기 몸과 존엄을 파는 일에 저항하는 것보다도 심지어 여성 인권이 가시적으로 퇴보하지 않는 것보다도 일단 생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이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타인이 감히 그것을 반대할 (명분은 있더라도)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말 ‘자발적’이라기엔 ‘내몰린’ 것에 더 가깝기에.
성매매를 애초에 가능케 한 남성 집단의 수요며 이를 눈감아준 국가에 대한 비판은 (반성매매 운동 쪽에서 훨씬) 맹렬하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신용제도의 거대한 유착 앞에 착취적 구조는 결국 ‘없애기 힘든 것’으로 자연화된다. 성구매자 남성 전체를 만족스러울 만큼 강한 형량으로 다스리는 법안이 생기지 않는 이상 처벌은 고사하고 죄에 대한 인지조차 시키기 힘들 것 같기 때문에 여성들은 무력해진다. 나아가 여성을 가정주부 혹은 창녀 둘 중 하나로만 귀속시키려 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도 무력해진다. 그래서 성판매 여성 개개인을 설득해 알아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더 쉬운 운동의 방법처럼 다가온다. 개개인의 도덕성의 회복에 몰두하는 것만이 올바르고도 유일한 방법으로 오인된다.
그리하여 ‘창녀’ 중에는 1) 멋모르고 끌려간 가련한 피해자, 2) 착취적 구조의 부당함을 알아서 깨닫고 탈성매매 후 반성매매 운동에 투신한 책임감 있는 ex-성판매자, 3) 2번의 반대항으로 탈출의 의지가 없는 데다 심지어 주변/후세대 여자들에게 그리 살아도 된다는 인식까지 안기는, 즉 책임감까지 부재한 ‘예비 포주’의 이미지만이 남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인가.
최근 강제철거당한 집결지 용주골에 살던 여성들은 현재 책정된 지원금이 실질적 필요와 맞닿지 않을뿐더러, 액수가 아닌 소통 방식의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80여 명의 종사자뿐 아니라 평생 그 골목에 부대껴 살아온 밥집, 세탁소, 미용실 이모들과의 우정을 공권력에 의해 철거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불법적일 만큼 높은 이자율로 쌓인 부채를 탕감하거나 월 100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만으로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30대 이상 싱글맘인) 그들 삶의 질이 나아질지는 미지수다. 그이들이 용주골이라서 가능했던 유대감 어린 관계를 다시 가질 수 있을 확률 역시 낮다. 부채뿐 아니라 미래의 소득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는단 점이 그들 발목을 잡고, 집계된 성매매 여성 수의 반쯤만 지원하던 관 일방의 탈성매매 계획안을 믿을 수 없으며, 요구받은 '확약서'는 지속적 신변 노출과 감시를 암시하는 와중, ‘바깥’은 어차피 낙인찍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투성이기 때문이다.
연구자 김주희의 질문대로 이들이 탈성매매 이후 '복귀'하게 될 성매매 이외의 '사회적' 영역은 과연 탈성애화, 탈매춘화된, 완벽히 성평등한 영역인지도 돌아봐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비일탈적, 정상적이라고 전제하고 성매매 시장의 대응항에 놓은 노동의 공간은 과연 남성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가. 탈성매매를 꾀하는 이들을 '유인'할 만큼 완전히 해방적인 공간인가. 말마따나 ‘멀쩡한’ 여자들도 그 좋은 스펙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힘들고 성별화된 저퀄리티의 비정규직 직군으로 내몰리는 시대에, 이전 경력이 전혀 없는 이들이 허술한 지원만으로 사회의 ‘정상적인’ 노동 인구로 ‘복귀’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9 to 6로 일하는 사무직 여성들도 돌봄과 가사와 직장 업무의 병행을 힘겨워하고 공적 영역에서 도움 받지 못하면 가족 중 누군가의 희생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마당에, 직업적으로 쿠팡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더라도 그외의 다른 모든 면에서 혼자가 된 여성은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용주골의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는 이모들과 동료들의 존재를 이 '마을 공동 양육'의 지점에서 언제나 꼼꼼히 호명한다).
결국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더 이상의 신규 유입은 근절/불허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거기서 당장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미' 너무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지어 그들의 존속이 전적으로 그들 탓이 아니기 때문에 종양 도려내듯 깔끔하고 신속한 제거는 가능하지 않고 심지어 부당하다. 논의와 준비의 시간은 무한정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너희가 동정해야 할)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종사자의 주장은 '영원히 성판매를 하고 싶다'고 해석되거나 더 나아가 '여기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 악하다'거나 '사주는 남성이 도와주는 여성보다 기껍다'는 (당사자가 직접 발화하지 않은) 서술로 잘못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성구매를 이미 해봤거나 영원히 여자를 발 밑에 두길 염원하는 남성들의 옹호도 징그럽게 달라붙어 본질을 흐린다. 심지어 성매매 당사자 중 누군가는 실제로 반성매매 측에서 발화한 이해의 근거를 성매매 자체에의 심리적 허들을 낮추는 근거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별 일 아닌' '스킨십 없는' '2차 없는' 안전한 일터를 표방하며 토킹바 같은 성매매 이전 단계 유사 업소로 어린 여자애들을 살살 끌고 간다. 그래서 모든 것이 언제나 난장판으로 귀결된다...
지금 당장 가능할뿐더러 합리적이고 장기적으로 전략적인 방법은, 퇴거와 자립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아주 충분히 더 주도록 정책 결정자를 설득/압박하는 것, 왜 저이들의 구제에 내 세금을 쓰냐고 성내지 않는 것(방산처럼 깜깜이거나 환율처럼 남성 1인의 오판으로 요동칠 수 있는 수없는 섹터에 살살 녹는 것보다야, 동료 시민 여성의 자립에 쓰이는 게 뭘로 보나 마땅치 않은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낙인찍기의 언어를 사용치 않는 것 정도 아닐까. 반성매매 운동에 직접 투신한 것이 아니면서, 강남의 수많은 텐프로며 키스방 전단 신고나 청원 한 번이라도 앞서지 못했으면서, 가장 취약하고 빈곤한 집결지에 대고 공장 노동을 하라고 게을러빠졌다고 다리 벌리고 쉽게 돈 벌고 싶어한다고 혹독하게, 떼거지로, 익명으로 혼내는 언술이야말로 이 의제의 디테일을 덜 알던 (나를 포함한) 이들의 잘못된 전략인 것 같다...는 게 몇 달간 관찰해본 이 시점의 결론. 언제나 말해왔지만 의제 뒤에 사람 있어요.
그러나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성노동’ 개념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누구도 성산업 종사자의 성을 팔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논조의 션 베이커는 물론 이 모든 ‘진입’과 국가적 묵인-관리의 구조에 대한 고민은 작품 속에 내비치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의 성산업 양상이나 주체적 성애화의 정도가 다른 만큼, 미국인에게 성노동자란 이미 너무 쉽게 가시화되는 - 그야말로 만연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한국의 탈성매매를 둘러싼 담론의 장에서 신용과 얽혀 고착된 경제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로 인해 성매매와 비성매매(사회)의 영역을 비경제적인 것으로 방치하는 흐름은 이미 자연화된지 오래인 듯하다. 션 베이커의 태도는 그 이상으로 천연덕스럽다. 사는 자와 파는 자의 욕망이 있는 한 ‘성산업의 자연발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정해둔 듯한 그에게 자기 신체를 유용해 돈을 버는 일은 몹시 자연스럽고 심지어 자랑스러워 마땅한 하나의 직군이다.
그래서인지 션 베이커 영화 속 사람들은 언제나 극사실주의 화풍의 팔팔한 생물인 채로 구덩이 속에 남겨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기존의 영화 문법처럼) 정물 아닌 생물이라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 판단도 제언도 없이 그저 서발턴의 목소리를 되찾아주려는 구상은 훌륭했을지라도, 판단도 제언도 없기 때문에 결국 그 목소리를 듣는 영화 외부의 사회에 처분의 전부를 내맡기게 된다는 난점은 해결되지 않는다. 영화에 압도당했다고 평하는 이들 대다수에게는 아마 성산업 종사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돌 던지면 안 되겠다는 당연하고도 명쾌한 깨달음 정도가 남을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이해와 상상의 여지없던 관객에게 그 정도 연민의 지대를 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션 베이커는 이 ‘사회’가 남성 중심의 착취적 욕구와 지배를 얼마나 자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즉 '성노동' 자체가 어떻게 존속/기능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질문하지 않기로 택한 것 같다.
<아노라>의 작법은 단순하고 단선적이다.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던 아노라에게 무책임하게 청혼하고 무책임하게 혼자 달아난 러시아 재벌 가문의 철부지 남편 바냐를 찾아다니는 플롯이 전부다. 로맨스나 사회고발보다도 로드 무비적 속성에 집중한 영화에서는 우즈베키스탄계 이름을 가진 아노라가 어떻게 스트리퍼가 되었는지, 언니와 함께 사는 철로 옆 허름한 집은 어떻게 구했는지, 스트리퍼의 삶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등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아노라는 '(착취적)성매매의 피해자'가 아니고 따라서 그애를 아는 데에 중요한 요소는 그애의 역사나 미래의 꿈 따위가 아니라 오직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지’에서의 구체적인 관습, 돈을 주고받는 구매자-판매자 간의 기묘한 우정, 포주 및 관리자들과 성매매 여성 간의 더 기묘한 공생관계(아노라가 업소를 영영 떠난다고 하자 울었고, 나중에 돌아온 아노라가 남편을 찾겠다고 소동을 일으키자 내쫓아버린 경비 여성 등)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성매매 장면 각각의 노골적 연출이 자주 비판받기도 하나 션 베이커의 신조는 늘 뚜렷하다. ‘성노동’을 긍정하고 낙인찍지 않는 것.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우리 모두 숨 죽이고 찬탄할 것.
사람을 직접 아는 일의 위력은 대단하다. 어제까지 경멸하고 혐오하던 이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사람은 경계 해제되기 십상이다. 바냐를 우아하리만치 능숙하게 잘 다루던 아노라의 태도가 180도 반전되는 순간의 낙차가 큰 만큼 관객은 숙연해진다. 이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아노라의 절박한 속삭임을 바라보며 진심의 밀도를 가늠하게 된다. 바냐를 사랑하는 진심이 아니라, 이제 와서 네가 열어준 삶에서 내쳐지고 버려질 수 없다는 진심이라 더 비참한 그것을. 게다가 이 영화엔 아노라를 지켜보는 보통의 인간들을 대변하기 위한 확실한 이입의 지대로 이고르란 인물까지 마련되어 있다. 연민 너머 무엇이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조용히 지켜보고 들어주기. 처음 접한 단면을 향한 시선이 동정으로 비추지 않도록 조심하기. 그러다가 모두가 그애를 답 없는 창녀라고 바냐의 가족이 꽃뱀에 잘못 걸렸다고 비난할 때, 홀로 "이반이 애니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나요?"하고 용감하게 고용주 앞에서 묻기. 이고르는 침묵만큼이나 그것을 찢고 나올 때의 태도로서 하나의 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한편 언제나 '오디오가 비지 않는' 영화를 제작해온 션 베이커는 이번엔 아노라의 (강제된) 침묵을 통해 성판매자가 사회에서 비가시화/탈각되는 로직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한다. 본래 션 베이커의 인물들은 아무리 영양가 없는 말일지라도 입 열기를 멈추지 않아 극에 긴장과 소란과 생기를 부여하는데, 중간중간 찾아드는 정적인 순간 - <탠저린>의 신디와 알렉산드라가 나란히 앉은 세탁소, <레드 로켓>의 마이키가 혼자 앉아있던 렉시의 침실, 마이키가 떠난다고 통보하자 렉시와 릴이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공모하던 눈빛 - 들은 극도의 대비 효과를 낸다. <아노라>에서는 이 정적이 유독 길고 잦게 활용된다.
바냐와의 신혼집에 아르메니아 이주민과 러시아계 빈민층 수하인들이 침입하자 아노라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대여섯 번 묻지만 바냐나 수하인들은 그를 철저히 무시한다. 러시아어로 바삐 소통하는 남자들 사이 아노라의 짧은 러시아어 실력은 도움이 되지 않아 완전히 배제당한다. 바냐가 혼자 내빼자 아노라는 충격과 분노에 젖은 채로도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데, 쩔쩔매며 협조를 요청하는 남자들을 발로 차고 소리 지르고 '강간당한다'며 길게 울부짖는 소란이 (아노라의 '노동' 환경을 일순간 엿보게 하는) 비극적 코미디를 만들고 당황한 남자들은 끝내 아노라의 입을 틀어막아버린다. 영화 내내 아노라의 얼굴이 풀샷으로 클로즈업되는 장면은 단 세 번 등장하는데 바로 바냐의 청혼을 받은 직후, 빨간 스카프로 재갈 물렸을 때, 엔딩씬 차 안에서 이고르를 바라볼 때다. 요동치는 감정의 현현으로 활용되는 클로즈업 샷 중 아노라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재갈을 물린 이 씬이 유일하다.
연락 끊긴 바냐를 찾아다니는 한겨울 여정 중 아노라와 토로스, 가닉, 이고르 일행은 추위 때문에 더더욱 말수를 잃는다. 하룻밤 새 바냐를 찾지 못하면 각자의 이유로 인생이 뒤집힐 위기에 처한 터라 남자들과 아노라의 얼굴은 초조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다. 운행을 멈춘 코니 아일랜드의 롤러코스터를 원경으로 한 네 사람이 일렬로 걸어갈 때 매서운 바람소리를 제외하고 끼어드는 소음은 없다. 그래서 관객은 '바냐를 찾더라도' 아노라의 운명이 어디로 어떻게 고요히 추락할지를 즉시 직감한다. 아노라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는, 아노라를 영원히 침묵케 하는 세상은 변함없고 바냐는 애니를 버릴 것이 분명하므로.
‘척’하는 미국의 허위를 낱낱이 해부하고, 정상성의 틈을 벌려 균열을 가시화하는 데에 성노동자의 현실을 매개하면서, 극사실주의로 그린 평범한 고난으로 하여금 막연한 타인을 우리 옆으로 끌어오겠다는 션 베이커의 전략과 기법은 분명 효과적이다. 백인 남성 감독으로서 생득적 우위를 점한 사람이 자기와 가장 먼 계층에 품는 책임감, 어쩔 수 없는 메일 게이즈에 대한 자기 인지, 그리고 그 꾸준함에도 약간의 경탄을 느낀다.
다만 <아노라>에 주어지는 세간의 호평과, 현실의 (아노라와 똑같이) 젊고 낮은 계급에 속해있고 취약한 여자들 - 다른 ‘부류’의 약자들 -이 투쟁하는 방식에 대한 시혜적 태도 내지는 과격한 조롱을 병렬 비교할 때, 아노라를 이해한다고 제 속에 내재된 편견을 다시 본다고 자기 자신을 갸륵해하는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많은 이가 여성에게 부과된 약자성을 ‘자기 일처럼’ 이해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결국 아노라의 인생이 이 시점 한국의 관객에게 승인되고 수용된 이유는 그가 기존의 가부장제 문법에 저항할 수 없는 (남성의 구미에 맞는)이라서, 기존의 '배급' 제도에 아무 해도 입히지 않는 이라서가 아닌가 묻게 되더라는 이야기다.
물론 아노라의 발화 의지는 화면 너머 관객을 찌를 정도로 날카롭고 호전적이다. 스트립 클럽에서도 매니저에게 '연금이랑 보험 안 해줄 거면 일주일 휴가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덩치 큰 수하인들 앞에서도 온몸으로 투쟁한 그는 이반의 재벌 부모 앞에서도 그들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고 바냐를 위협한다. 션 베이커는 아노라의 투철한 주체성을 근거 삼아 여성의 '성노동'을 남성 욕구에의 기생이 아닌 적대적 공생으로 재해석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성노동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최종 병기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노라가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결혼을 포기하고 바냐를 비난하며 돌아서는 장면에서 이반의 어머니 갈리나가 당하는 처사가 의미심장한 증거가 된다. 갈리나는 아노라와 날 세워 대립하며 비겁하게 침묵하는 아들을 대변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우습게 만든다. 악에 받쳐 갈리나를 조롱하는 아노라의 언사에, 내내 근엄하던 이반의 아버지는 가족 편을 들지는 못할망정 갈리나가 잠시 말문 막혀하는 꼴을 보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댄다.
그 순간 갈리나가 아노라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여성, 최상위 계급에 속한 여성이라는 사실은 무색해진다. 그는 남편 앞에서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결국 토로스와 가닉도 쩔쩔매던 갈리나의 계급 내지는 권위조차 남편이 '허락'해준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아노라가 탐내던 이반 가문의 한 자리가 여성에겐 얼마나 허황한 약속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여기에 더하자면 이고르의 위로 같은 한 줄 논평이 따라붙는다: "너 그 집안에 시집 안 가길 잘했어."
션 베이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노라와 같은 '성노동자'들이 일처일부의 가부장적 결합 이전, 낭만적 사랑의 발명 이전, 전통적인 시장에서의 금융 행위자로서의 여성 주권을 되찾아올 키맨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마녀사냥 이전의 '창녀'들이 실은 가장 부유하고 기세등등하고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여자들이었다는 과거에의 믿음. 오롯이 자기 몸을 투자의 자산이자 노동력의 원천 삼는 '노동'으로써 스스로를 구제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 복속됐던 경제 주권을 복권하며, 남성의 (없애거나 처벌할 수 없는) 욕구를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운용하는 역할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아내로서 귀속되지 않은 성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셈이다. 관객이 이 논리의 전개에 동의하든 않든 션 베이커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노동자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며 다시 입장을 굳힌다: '성노동'을 긍정하고 낙인찍지 말 것.
섬세하고 영리한 <아노라>의 전술은 관객을 가장 논쟁적인 장에 도전자로 초대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션 베이커와 조금 다른 방향의 운동도 가능할까. ‘성노동’을 긍정하지 않되 낙인찍지 않는 것. 인류의 탄생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호도되어 온 성매매가 착취적 성차에 복무한다는 사실은 자명하고, 궁극적 근절이란 목표 지점이 같다고 치자. 이때 '창녀'나 '매춘'에서 모욕과 경멸의 의미를 걷어내는 포괄적 용어로써 '성노동'이 합당하냐 아니냐는 덜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것들. 인정을 보여준 이고르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섹스로 감사 인사를 갈음하려던 아노라에게서 터져 나온 울음을 보고 그것이 수치심 때문이리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려는 자세. 업소나 바냐와의 계약 관계 너머 아노라가 아노라로 존재하는 공간(우유를 사오지 않았다고 언니에게 혼났던 집, 꽁꽁 싸매고 걸어다니던 길거리)에서 그이가 어떤 얼굴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오래도록 들어보려는 의지. 그가 창녀라는 호명에 움츠러들지 않고, 동료 시민의 낙인 없는 시선을 믿고, 스트립 클럽에 출근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관습적 차별적 인식을 뜯어고치고 빈곤한 사람을 더 빈곤하게, 빈곤한 여성은 더더욱 빈곤하게 만드는 자본에 다함께 저항하려는 결기를 갖추는 것까지도.
참고
<'성매매 피해자'가 감히 성매매 피해자 지원 조례에 저항한 죄, 패소비용 440만원> 기자회견에 연대발언으로 함께했습니다 - 셰어
https://srhr.kr/announcements/?bmode=view&idx=21180204
파주 용주골,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 일다
<레이디 크레딧>, 김주희
Sean Baker Makes Movies About Sex Workers in Hopes of ‘Helping Remove the Stigma’ — and He’s ‘Already Talking About the Next One’, Var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