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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y 18. 2024

비즈니스의 냄새

냄새는 커튼을 뚫지

  "난 사실 인도보다 비즈니스가 더 기대돼"


  인도로의 여행이 결정되고 난 뒤 내가 습관처럼 했던 말이었다. 비행기는 숱하게 타봤지만 늘 이코노미와 비즈니스를 구분해 놓은 커튼 한 장은 넘어본 적 없는 나였다. 사실 당연하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비행기를 자주 타 본 것만으로도 이미 우와하고 탄성 나올 가격과 여유니 말이다. 그런 우리 가족들이 이제껏 열심히 모아 왔던 마일리지를 끌어모으고 또 끌어모아, 난생처음으로 비즈니스 석을 예매하게 된 것이다.


라운지에서 먹은 간식과 타자마자 받은 샴페인 한 잔.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존재 자체가 특별했다.


  일찍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다 면세점 구경도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타자마자 건네주는 웰컴 드링크와 작은 간식봉지. 아, 이게 시작이구나 어쩌다 맞이한 부르주아 체험!


기가 막혔던 하늘 위에서의 코스요리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었던 좌석. 정말 좋았다.


  결론은 환상적이었다. 평소에도 다리가 쉽게 붓는 나는 아홉 시간의 비행에도 단 한 줌도 붓지 않는 다리와, 형형색색의 음식들 앞에서 정신을 못 차렸다. 제공되는 헤드셋은 짱짱한 노이즈캔슬링으로 비행기의 소음이라곤 모르게 만들었고 커피 한잔과 제공되는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엄마와 나는 맘껏 부미(味)를 만끽하며 아이처럼 깔깔댔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필수 코스, 라면을 주문했다. 연달아 나오는 음식에 배가 터질 것 같았어도 하늘 위에서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먹어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먼저 엄마의 라면이 나오고 화구가 하나뿐이라 내 것은 조금 더 걸린다는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에게 부탁해 라면을 먹는 모습은 퍽 웃겼다. 불 하나를 켜 두고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삼키는 모습은 뻘쭘하기도, 웃기기도 했다. 라면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 쫄깃한 면이나 얼큰한 국물보다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냄새에 있지 않나. 나는 내 라면이 끓여지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 버린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비행기에서 맡았던 라면 냄새의 출처를.


  비행기를 탈 때, 종종 기내식이 나오지 않는 시간대에 탄 적이 있다. 기내식이 나오더라도 분명 내 앞에 있는 건 비빔밥이나 소고기 덮밥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상하게 어디서 라면 냄새가 나는 거다. 어린 마음에 라면 냄새의 출처라도 알고 싶고, 괜히 이 기내에서 비싸다는 라면을 시켜 먹는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 하는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옆자리 앉은 친구나 가족에게 물었다. 


  "어디서 라면 냄새나지 않아?"


  그러면 십중팔구, 누가 시켜 먹는가 보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우리는 보던 영화를 마저 보거나, 먹던 기내식을 마저 먹는 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껏 하늘 위에서 맡았던 라면냄새는 그냥 라면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라면이었다. 철저한 계급사회가 커튼 뒤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지내왔었지만, 그 틈새로 배어 나오는 계급의 냄새만큼은 가릴 수 없었던 거다.


  하늘 위에서 먹는 라면은 어쩐지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다. 컵라면이어서 그랬는지, 배부른 상태에서 먹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평생 잊지 못할 라면과 비행기이겠지만, 어떤 의미로 기억에 남는지는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커튼 한 장으로 뚝 떨어지는 계급의 현실 앞에서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인도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었다. 먼저 씻고 있는 엄마와 오늘 갈 목적지를 위해 길을 찾고 있는 아빠. 밤새 정말 깨끗한 매트리스가 맞는가 의심하며 잠을 자고 일어난 나까지 셋은 나름의 분주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테라스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치를 기대하며 나는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빛나는 해를 바라보았다. 테라스와, 햇빛 아래에는 어젯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판자들을 겨우 세워놓고 사는 작은 동네였다.


  쌓인 쓰레기 더미 옆에서 쪼그려 앉아 양치를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난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코끝엔 아직도 짙게 라면 냄새가 배어있었다. 무시하고, 어쩌면 무지한 상태로 살고 있었던 계급의 세상. 바이킹을 탈 때 속 안에서 무언가 덜컹 내려앉으면서 돋는 소름처럼 무언가 나를 끈덕지게 훑고 지나갔다. 하루 만에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떨어져 본 기분이었다.


  동생은 그랬다. 집 앞에서 나를 태워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데려다주는 기사님, 나의 일이 늦어지건 취미생활이 늦어지건 오로지 나를 위해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인도의 무더운 더위도 실감 못하게 하는 시원한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너무나 익숙해질까 두렵다고. 나도 비행기 라면 냄새의 출처를 알게 된 순간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으나 맞다, 두려움이었다. 선명한 계급사회를 느끼고 난 뒤에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익숙해지는 것과 자각해야 하는 것들. 


  겨우 한 번의 비행으로 다소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의 비행이었기 때문에 계층의 선명함이 나에게는 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돌아오는 이코노미석에서 나는 또 한 번의 라면 냄새를 맡았다. 비빔밥과 함께 삼킨 라면 냄새로 인해 나는 한동안 소화불량과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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