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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페 Jul 27. 2018

문화의 도시 뉴올리언스, 그 안에서 현대음악이 태어나다

Old man Jazz : ep. 0 [재즈의 탄생과 역사적 관점]

Old man “Jazz” : ep. 0 [항구도시 뉴올리언스]



일반 역사, 혹은 문학사에서 우린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시대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시대를 구분하지만 포괄적으로 중세부터 근대까지를 클래식 음악으로 구분짓는다. 차이점이라면 음악사는 역사적 사건보다는 사상의 흐름, 즉 사조를 기반으로 시대를 구분 짓는다는 점이다.


대중음악에서의 대중은 어떠한 특정한 인종이나 혈통이 아닌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즉,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이전의 '학파'와 '주의'의 클래식 음악의 기반엔 낭만주의, 인상주의처럼 어떠한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말은 곧 클래식 음악이 길거리에서 장사하고 농사짓는 일반 시민까지 포함한 진정한 의미의 대중이 아닌, 그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일부 교양인들을 위한 음악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클래식 음악이라고 중세부터 근대까지 모두 귀족, 교양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 고전파 클래식 음악은 귀족에 속한 궁정악단이 클래식의 주류였다면 1840년, 헝가리의 프란츠 리스트의 독주회에서 처음으로 리사이틀(독무대)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음악에 아티스트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예술가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것을 의미하며, 완전하진 않지만 클래식이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띄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례로 베토벤의 장례식에 수만 명의 인파가 광장에 모여서 베토벤의 죽음을 애도한 일은 음악이 더 이상 교양인만의 음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근대음악은 대중음악을 포함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클래식 음악을 의미한다. 음악사에선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30년간의 음악을 근대음악이라고 칭하고,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 현재의 모든 음악을 포괄적으로 현대음악이라고 지칭하지만, 음악사에서 근대음악의 시기로 지칭하고 있는 1차 세계대전(1914년)이 일어나기 도전에 재즈는 이미 뉴올리언스에서 형태화 되어있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일반적으로 음악사의 시대 구분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의 흐름(사조)으로 구분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재즈의 탄생을 시작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대중음악이라는 개념이 생기며 더 이상 특정한 사조나 작풍에 의하여 음악의 시대를 구분 지을 수 없어졌기 때문에 현대음악의 시기적 구분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도 있었고, 초기 재즈의 과도기적 형태를 용이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번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이고 초기 재즈의 과도기적 형태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가장 초기 형태의 재즈를 뉴올리언스 재즈, 몇몇은 딕시랜드 재즈라고 부른다. 아주 작은 차이점이 있지만 편의상 이 매거진에선 뉴올리언스 재즈라고 통칭하겠다. 뉴올리언스 재즈라 불리는 이유는 재즈가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 발전했기 때문인데, 단지 뉴올리언스 안에서 연주됐던 재즈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닌, 1900년대 초 미국 전역에서 연주되었던 모든 재즈를 포괄적으로 뉴올리언스 재즈라고 부른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재즈의 등장 배경에는 역사적, 음악적으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역사적 관점으로 보자. 18세기 초, 아직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도 전에 현재 뉴올리언스에 해당되는 곳은 프랑스가 식민지로써 지배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이 끼고 있는 이곳이 무역의 중심지가 될 거라 생각하여 프랑스의 오를레앙(orleans)을 본떠 신 오를레앙(New orleans)이라는 이름의 항구도시를 지었다. 알다시피 이 시기는 전 세계에 식민지 무역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고, 뉴올리언스 또한 100년이란 시간 동안 프랑스, 스페인, 미국에 여러 번 소유권이 넘어간다


뉴얼리언스의 한 가운데를 미시시피강이 지나가고 동남북으로 멕시코만에 둘러쌓여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소유권이 여러 번 넘어가는 과정과 항구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독일과 아이슬란드 등 유럽 각지에서도 이민자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스페인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 또한 증가하게 되면서 노예제도가 판치던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다문화 다인종의 공존이라는 특이한 문화가 뉴올리언스 안에서 형성이 되었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뉴올리언스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이 이뤄졌는데, 그중엔 자유의 몸을 얻은 흑인과 백인간의 결혼도 있었다. 이들의 아이들을 크레올이라 부른다. 초기의 크레올들은 외관상으론 흑인이긴 했지만 백인들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으며, 신분상으로도 백인과 다를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백인들과 같이 고등교육을 받고,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높은 수준의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어찌 보면 노예제도가 크레올의 방패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크레올들은 주로 자신들이 나고 자랐던 뉴올리언스에서 활동을 했는데, 19세기 중반, 크레올들에겐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링컨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수백 년간 노예라는 낙인이 박혀있던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흑인들의 자유는 인간으로서 누릴 당연한 권리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 흑인들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아니라 돈을 주고 구매해서 부리는 물건 혹은 짐승에 가까웠다. 졸지에 자신들이 값을 지불하고 산 흑인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버리니 백인들은 당연히 흑인들을 아니꼽게 생각했고 그렇게 미국 사회 전역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난무하게 된다. 이는 크레올들이 주로 군집해있던 뉴올리언스도 마찬가지였다.


크레올과 흑인을 구분지어주던 노예제도가 사라지면서 크레올들은 흑인들과 같이 "피부가 검다"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한다. 그렇다고 흑인들이 크레올을 호의적으로 생각했냐고?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크레올은 자신들을 차별하던 백색 인종들과 다른점이 없었다. 신분제도가 자신들과 크레올을 구분지어줬을 때, 크레올도 백인과 같이 흑인 노예를 부리고, 이들과 다른 혈통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선진교육까지 받으며 자란 상류층이었다. 마찬가지로 크레올 또한 자신들이 유럽에서 배워온 높은 수준의 음악적 지식이 이들과 비교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 같은 듯 다른 크레올과 흑인들의 이질적인 벽은 시간이 흐름으로 경계가 허물어지며 결국 크레올과 흑인들 사이엔 음악적 소통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던 흑인들의 음악은 크레올들이 유럽에서 배워온 높은 수준의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점점 체계화되고 이론화되며 재즈는 뉴올리언스 안에서 조금씩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흑인들에 대한 오랜 억압과 차별은 역사상 가장 비 인륜적인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듯 음악과 역사는 굉장히 밀접하다.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 단순히 예술의 감상 행위에 역사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술을 감상함에 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라던가 사건들이 대한 지식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예술을 올바른 시각과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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