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실로 진귀한 경험이다. 단편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의 세계와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자신만의 테마파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논다는 점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 같은 인물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을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리고 그 세계가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마주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일상은 어지럽고 난감하고 구질구질한 반면 소설 속의 세계는 언어라는 질료로 견고하면서도 흥미롭게 축조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 소설은 나를 환영하고 있다. 나를 초대하고 언제나 내가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자신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 오래 준비해 온 대답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일상은 자주 어지럽고 난감하고 구질구질하다. 현망진창(현실이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다)인 인생에서 나를 언제나 열렬히 환영해 주는 곳이 있다.
고양이들은 ‘너를 경계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눈을 깜빡이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유대와 애정의 의미로 커서가 깜빡이는 바로 이곳, 브런치 스토리 같은.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공간. 새하얀 창은 두 팔 벌려 나를 기쁘게 맞는다.
글을 쓰는 행위는 창작의 하나이다. 나의 경우 진공 상태에서 둥둥 떠 다니는 경험 중 기억에 남았던 일부를 잘라내, 이곳에 정리하여 보관한다.
완벽한 사실에 입각해 조서 작성하듯 쓰지 않고, 적절한 비유와 나름의 유머러스함으로 있어 보이게 쓴다. 정확히 말하면 읽는 사람들이 재미있도록 쓴다. 그러니 각색은 필수이고, 어떤 면에서 나는 에세이가 소설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거지 같은 하루를 보낸 날에도 글을 쓰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루 내내 아무것도 얻은 게 없고, 마이너스 감정만 켜켜이 쌓은 것 같을 때도 글을 쓰면 최소 하나의 교훈은 남는다. 이런 날도 글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교훈. 눈을 감고 하루를 돌아보면 짜증이 먼저 올라올 것이다. 감고 있던 눈을 더 질끈 감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글로써 하루를 돌아보면 제3자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마치 소설을 읽듯이 말이다.
오늘은 거지 같은 하루까진 아니었지만, 피로도가 높았다. 그런 저런 대화가 오갔고, 대화 속에서 느낀 기쁨과 슬픔은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텍스트로 남긴다. 구질구질한 일상이 미화되어 조금 아름다워 보인다.
급하게 마무리해 본다. ‘언젠간 이것도 귀한 경험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