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가 언제 성숙해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삶의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지식과 단순한 사실을 넘어 진리에 가까워진 과학적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한 그 앎은 각자의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른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일한 내용이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 성숙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모두 저마다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머릿수만큼 그들 각자의 세계가 있다.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는 있어도 결코 동일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을 과연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저 ‘변화’가 아닐지도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과정과 결과가 어떨 것이라고 보장하는 것도, 어떠해야 한다고 확정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존재이다. 찰나의 순간에 삶을 바꾸는 영감을 얻을 수도 있고, 주름이 한 줄 늘어도 그전과 변함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느 젊은 대학생이 며칠 동안의 열차 여행으로 얼마나 큰 변화를 겪어도, 또는 전혀 변하지 않아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6번 칸>은 무르만스크 행 기차의 ‘6번 칸’에 우연히 함께 하게 된 두 남녀가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변해가는 감정과 관계를 그린 영화다. 고고학을 공부 중인 핀란드 출신의 모스크바 유학생 ‘라우라’는 고대 ‘암각화’를 보러 간다는 설렘도 잠시 ‘6번 칸’에서 술에 취해 무례한 질문을 하는 ‘료하’와 마주하게 되고 그와 거리를 두려 한다. 하지만 ‘료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라우라’에게 다가가고,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과 관계를 변화를 겪게 된다.
영화 예고와 포스터를 보고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보니 여러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홀로서기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한 인물의 성장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다.
주변 인물들
타인과의 만남은 때로 거울처럼 자신의 모양을 선명하게 보여주곤 한다.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부분이 무르고 어느 부분이 단단한지, 어느 부분이 예민하고 또 어느 부분에서 관대한지, 자신의 혹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부분과 움푹 패인 부분을 우리는 타인을 통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라우라는 홀로 고대 암각화를 보러 떠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한다. 먼저 그녀의 연인, 문학 교수 ‘이리나’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사교파티에서 이리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이지적인 농담을 건네지만, 연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가 감돈다. 이리나는 라우라를 구성하는 세계의 핵이었다. 헌신의 대상이자 삶의 기둥인 것이다. 여행의 목적이던 무르만스키의 암각화도 사실은 이리나로부터 시작되어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다니던 애착 표상일 뿐이며 이리나라는 관념을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았다. 암각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리나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댄 핑계였을 뿐이다. 이리나가 떠나간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애초에 떠나가지도, 떠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라우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료하의 소개로 만난 노파는 여성의 영리함을 이야기하며 내면에 사는 작은 동물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라며 라우라를 위해 건배한다. 무르만스키가 아닌 라우라를 위한.
라우라와 동향인 핀란드인 남자는 기타를 들고 혼자 떠돌아다닌다. 마음에 이리나라는 축이 세워져 있는 라우라는 남자에게 외롭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만 남자는 인생이 원래 외로운 것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이미 이리나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걸며 인간 본연의 고독을 실감하고 있었던 그녀에게는 퍽 묵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중간 역에서 내리며, 라우라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인 캠코더를 훔쳐 간다. 거리, 사람들, 모스크바에서의 모든 추억들이 담겨 있는 그것을.
료하의 존재
흔히 젊은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며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중 대다수는 그것을 성애적 감정, 사랑이라고 인식한다. 학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관념을 학습한 대가로 실제를 이미 인식해온 틀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 자체가 학습이기에.
료하와의 관계는 사랑으로 정의하기보단 라우라의 세계 재인식 또는 재창조, 탈피의 계기로 쓰이는 일종의 소품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졌다. 라우라라는 존재의 내면 묘사가 너무나 깊고 그쪽에 치중되다 보니 인물로서 료하를 바라본다면 다소 빈약하다는 면이 있었다. 료하는 오롯이 그녀 스스로 고독을 누리고, 존재하는, 그것이 당연한 세계로 변화하는 과정의 안내자로서 라우라의 성장을 돕는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차에서 이성 간의 만남은 <비포 선라이즈>처럼 설레고 낭만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안아주고,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의 해독제가 되어주는 만남 역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특별한 기교 없이 꾸밈없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전문필진 | 박세나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