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와 나」(2023)를 보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리고 2022년 10월 29일, 또래 친구들과의 이별을 겪었습니다. 주변인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었다는 비극적인 참사라는 점에서 영문 모를 상실에 관한 아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조현철 감독의 수상소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그는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은 단순한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너와 나」(2023)는 감독의 이러한 가치관을 반영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사실은 만들었다기 보단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감독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결말을 궁금해하며 내달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연루된 내일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이 작품은 ‘그 사람이 여기 있었다’와 ‘그 사람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 사이를 시계 추처럼 오가는 영화였습니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물이 반쯤 채워져 테이블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물컵, 빨간 배낭을 맨 아이들… 꿈처럼 뿌연 화면에서는 그 자리에 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물들이 인서트로 포착됩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거울들.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의 모습을 따르다가 줌 아웃하여 교실을, 그리고 교실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통해 한 학생의 뒷모습을 비춥니다. 거울에 상이 맺히고 사라지듯,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합니다. 거울은 그곳에 누군가가 실재했음을 무엇보다 확실히 드러내는 사물입니다. 수학여행으로 세미를 보내고 남겨진 하은의 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울들은 누군가가 여전히 곁에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앞두고 세미와 하은은 마치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연인들처럼 서로를 데려다 주기를 반복합니다. 세 번, 네 번까지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죽음을 앞둔 누군가를 보내기 싫었을 것입니다. 뒤돌아가는 세미의 뒷모습을 보며 곧바로 지루하다고 느낀 것을 후회했습니다. 애도에 기간이라니, 그런 것을 정해둘 수 있을까요. 애도는 슬픔이 지속이 아닌 슬픔의 종결을 위한 작업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입니다. 상실을 봉합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 상처를 위로할 합당한 언어가 우리 공동체 안에 존재하지 않을 경우, 슬픔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저항의 수단이 됩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저자 백상현은 말합니다. 애도의 작업이란 우리가 상실한 것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 하려는 가장 진실한 투쟁의 형식이라고.(*같은 책, 21쪽)
이것이 애도에 기간을 두어 상처를 섣부르게 봉합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대해 지겹다고 말하는 것이 참혹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방을 보낼 수 없어 헤어짐을 유예시키는 단순한 그 장면 이후 생존자와 피해자라는 피상적인 단어의 의미로 느껴지던 인물들은 제게 죽음을 앞둔 자와 그를 떠나 보낼 수 없는 자의 사적인 이야기로 클로즈업 되어 보였습니다.
“클로즈업의 대척점에 통계가 있다” 존 버거의 말입니다. 단짝 친구와의 갈등으로 ‘체념’을 부르는 세미의 모습에서 역시 재난으로 인한 사회적 참사는 친구와의 이별이라는 사적인 의미로 클로즈업 됩니다. 감독은 말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기 보다는 언제나 특정한 개인에게 말을 건다는 느낌으로 작업한다고. 희생자 수 304명이라는 통계적인 수치가 아닌 클로즈업 된 개인의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진짜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두 소녀에게 주어진 단 하루를 함께 살아보며,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