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역사는 길고 갈래는 많다
나는 SNS에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자주 쓰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낯선 사람들과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온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말이 하나 있는데, "페미니스트라는 X이 꽃무늬 블라우스에 핫팬츠에 긴 머리? 탈코부터 하세요~"라는 댓글이었다. 당시 내 페이스북 헤더에 걸려있는 사진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총여학생회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불법촬영 및 성범죄에 대해 얘기하는 내게 "페미니즘은 좋지만 님은 너무 갔다"거나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고 하는 사람도 만나봤다. 분명 나는 한 사람인데 누군가에게는 페미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과격한 페미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대체 페미니즘이 뭐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사상인 동시에 학문이고, 또 인권운동이기도 하다. 뒤에 ~ism이 붙는 단어들이 으레 그러하듯, 페미니즘 역시 무척 광범위한 단어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과연 페미니스트인지, 혹은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도 좋을지 고민하고는 한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은데요. 그렇다고 페미는 아니고요.' 같은 이상한 말까지 나온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닐까봐, 아니면 내가 페미니스트일까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간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가장 쉽게 말해서 페미니즘의 정의는 '여성 인권 신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성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차별받아왔고 가장 익숙한 형태로 차별받는다. 이런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고, 분노한다면 당신은 페미니즘을 하고 있으며 페미니스트가 맞다. 그게 페미니즘의 가장 큰 기초니까.
한동안 페미니즘을 하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성차별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다. '기본값'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은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니며, 대중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모든 대중을 페미니스트라고 가정하고 오히려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을 특징지으려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결국 밥그릇 싸움이다. 모든 운동이 그렇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밥그릇을,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의 밥그릇을,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하는 투쟁이다. 밥은 생존의 수단이고, 밥그릇을 뺏긴다는 건 생존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밥그릇을 '인권'이라고 부른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무렵이다. 프랑스 혁명을 비롯해 인권 의식이 자라나던 그때, 여성들이 단결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페미니즘 중에 가장 유명한 사건은 여성의 참정권 획득일 것이다. 불과 200년 전쯤에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묘한 기분이 든다.
그 이후로 페미니즘은 1세대, 2세대, 3세대까지 역사를 쌓아왔고,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갈래로 분화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등 각 갈래마다 성차별과 가부장제 철폐의 방법이 다르다. 그렇다고 이 중의 하나만 올바른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선택한 길이 조금 다를 뿐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남충' '흉자' '재기해' 와 같은 말들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그 말들을 서슴없이 쓰는 사람도 있고, 그런 말들이 불편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둘 중의 하나만 페미니스트인 것이 아니라,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거친 언어를 쓰는 페미니스트들은 보통 '미러링'이라는 전략의 효과를 주장한다. 그 방법이 과연 정당하냐는 물음과는 별개로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김치녀와 된장녀 같은 단어들이 예능에 버젓이 등장하던 과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단어가 혐오 단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지금 한남충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이 상황에 미러링이라는 전략이 얼마나 큰 힘을 보태어주었는지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효과가 좋더라도 혐오를 혐오로 받아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묻는 사람도 역시 필요하다. 폭력이 위험한 이유 중에 하나는, 쉽게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젠더 권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이 지금껏 누려온 혜택은 상실될 수밖에 없지만, 페미니즘의 목적은 남성 인권의 추락이 아니라 여성 인권의 신장이니까.
주변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탈코르셋(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되어온 것을 수행하지 않는 운동)을 하지 못해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아서, 국민 청원을 하지 않아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물론 앞에서 나열한 것들을 하면 좋고, 하는 사람을 응원하지만, 그게 전부다. 페미니스트 안에서 굳이 계급을 나누고 진짜와 가짜를 가릴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은 그냥 페미니즘이다. 여성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