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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루 Jun 13. 2019

퀴어로 사는 삶

나를 그냥 나로 내버려두세요

  오픈 퀴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는 사람을 말한다.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음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애자라고 짐작하고 넘어가는 이 사회에서, 나는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오픈 퀴어라고 부른다.


  나는 판섹슈얼이다. 범성애자라고도 부르며, 나는 상대방의 젠더가 무엇이든 간에 연애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사람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혹은 그 외의 성별을 갖고 있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내 개인 SNS에 올린 바 있으며 누군가 물어보았을 때 숨기지 않는다.

  내가 오픈 퀴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솔직하게 말해서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가장 친한 친구들 중에는 포비아가 한 명도 없으며, 내 주변인들은 보통 퀴어거나 혹은 퀴어프렌들리(퀴어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 앨라이라고도 부름)하다. 나는 내가 퀴어라는 이유로 비난받은 경험이 거의 없다. 또한 나 스스로가 퀴어임을 자각하기 전에도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운이 좋은 사람보다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다. 청소년 퀴어들은 자신이 퀴어라는 이유로 가정과 학교에서 비난받고, 심한 경우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청소년 퀴어들의 자살률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성인이라고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지만, 청소년의 경우는 더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이 점이 무척 위험하다.

  또 종교도 문제가 된다. 개신교는 특히 동성애에 대한 배척이 심하고, 옳고 그름과는 관련이 없는 성지향성에 대해 틀렸다고 말한다. 그 집단 안에도 분명 성소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태신앙인 친구 중에도 성소수자는 있다. 목사님의 자녀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고, 독실한 신자 중에도 성소수자는 있다. 나 역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크리스챤이지만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길 잃은 양을 보듬어 안아야 할 교회가 가장 앞장서서 돌을 던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퀴어로 사는 삶에서 까다로운 일 중의 하나는 정체성은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내가 여성이라고, 나는 황인이라고,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가 판섹슈얼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 애인의 성별을 남성으로 한정짓고,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하면 '애인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버린다.

  나는 오픈퀴어기에 말 한마디 두마디를 얹어야하는 약간의 불편을 겪을 뿐이지만, 오픈퀴어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매번 거짓말을 해야 하거나, 말을 돌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 정체성이 탄로나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한 감정들 속에서 퀴어들은 존재가 지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사회에서 권력은 '기본값'에 달려 있다. 실제로 그 수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더 익숙하게 생각하는가의 문제다. 젠더의 관점에서는 남성이, 신체 기능의 관점에서는 비장애인이, 나이의 관점에서는 성인이, 성지향성의 관점에서는 이성애자가 기본값에 해당한다. 기본값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워진다. 따라서 퀴어들은,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고 끊임없이 외쳐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타인의 인정과 상관없이 내가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면서 항상 그렇듯 혐오 세력의 반대 집회도 함께 열렸다. 안 그래도 평상시에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딱 하루 당당하게 서는 게 싫다는 집회가. 보고 싶지 않다면 굳이 오지 않으면 되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공연이며 피켓이며 준비해 온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 특히 성경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원수를 포용하고 십자가에 못박혀서도 옆 자리의 죄인을 구원하는 신을 믿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게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피와 살을 나누어야 한다. 사랑이 으뜸이라는 종교에서 혐오 세력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럽다.

  또한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오픈 퀴어도, 오픈 퀴어가 아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허락없이 사진 및 동영상을 올리는 행위는 초상권 침해이며 언론이라고 하더라도 그럴 권리는 없다. 퀴어는 특히나 아웃팅(상대의 동의 없이 그 사람의 성정체성을 폭로하는 것)에 민감한 사람들이고 아웃팅은 실제 판례 상 범죄에 해당한다. 그 사람의 직업, 인간관계, 일상 생활 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퀴어에 대해 무자비한 사회다. 동성 커플은 결혼할 수 없다. 몇십년을 같이 살았다해도 애인이 동성이라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할 자격이 없다. 좋은 부모가 될 자질이 충분해도 아이를 입양할 수 없다. 초등학교 교사가 과연 오픈 퀴어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퀴어는 피곤하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인데, 세상은 자꾸만 네가 그런 사람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게 고쳐줄 수 있다고 물어온다. 사실 성 지향성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개인의 정체화는 오롯이 그 개인의 몫이다.

  퀴어들의 상징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아 무지개다. 비가 갠 후에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 퀴어들의 삶에는 언제쯤 무지개가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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