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 밸리 (Napa Valley)와 소노마 (Sonoma)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와인의 즐거움을 몰랐다. 사실 학생 때는 다들 주머니가 가벼우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술 먹고 놀 땐 무조건 값싸고 도수가 센 술로 취할 때까지 달리자라는 마인드였기에 와인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이 잘 없기도 했거니와 있다 해도 뭔 허세를 부리냐며 타박하는 게 당연했었다. 그때는 맛도 잘 몰랐다. 화이트 와인은 그냥 시큼하고 레드 와인은 뭔가 입안이 텁텁했달까.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술자리에서는 와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와인을 공부한다거나 딱히 즐겨마시는 종류의 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간신히 몇몇 종류의 이름만 기억하고 그들의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알듯 말듯한 수준에 불과한데, 매년 수십 병의 와인을 마시면서도 와인 맛을 잘 모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사실 와인을 마시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적당히 고급진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지나치지 않는 알코올 농도를 술자리에서 유지하기 좋고 거창한 안주도 필요 없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소주는 다음 날 속이 힘들고, 맥주는 마시면서 너무 배부르고, 위스키나 보드카는 도수가 너무 세고, 뭔가 적당히 마시면서 살짝 알딸딸하게 취하는 기분을 즐기기에는 와인이 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중 90% 이상이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다. 미국 와인은 사실 전통의 강호 유럽(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등)에 밀려 예전에는 저평가를 많이 받았었는데 1960년대 이후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단 기후적으로 건조하고 서늘하면서도 온화하고 변덕스럽지 않은 날씨인 데다가 1년 내내 충분한 햇빛이 들어 와인을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얘기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Judgment of Paris' (파리의 심판)이라는 사건이다. 세계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던 캘리포니아 나파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프랑스에서 열린 블라인드 와인 시음회에서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프랑스 와인들을 꺾고 선택받았던 와인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고도 하는 사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 나파 쪽에 큰 산불이 나서 수십 개의 와이너리가 전소되고 수십 명의 인명과 수많은 재산 피해를 입었는데,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축복받은 따뜻함이 있지만 또 그와 함께 극강의 건조함이 있어서 일단 불이 붙기 시작하면 바람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 나파에서 발생한 산불 연기가 샌프란 시스코까지 엄청 날아와서 한동안 이곳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했었는데, 그때 며칠간 뉴스에서 북경보다 공기가 안 좋다는 보도를 해서 이곳 사람들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로 심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 2-3년 들어 매년 북가주 남가주를 종횡무진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산불들을 보면 걱정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도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에서 큰 불이 났었고, 7월 말에 멘도시노(Mendocino)라는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진화시키지 못한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대의 산불이라고 하니 참 큰일이다. 글로벌 워밍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점점 심각해지는 요즘 정말 지구가 점점 아프고 있는 게 틀림없다.
... and the wine is bottled poetry..
나파 밸리는 캘리포니아의 자랑이다. 남가주(SoCal)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해변과 백사장이라면 북가주(NorCal)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록 농장들이 있다. 아마도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 샌프란 시스코를 방문하면서 나파 밸리를 가보지 않는다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디즈니 랜드를 제외하고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성인 방문객이 압도적일 테니 어찌 보면 이건 실로 대단한 거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가 처음 나파를 방문했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나파를 가서 아무렇게나 대충 아무 와이너리에 들렀었는데 했었는데 동선이 엄청나게 낭비되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쉽게 길이나 와이너리를 검색할 스마트폰이 없던 때였다는게 변명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지역, 그리고 어느 와이너리를 갈지를 미리 결정해 놓고 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몇 년 부쩍 여행을 가는 횟수가 늘었는데 (Yolo!),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맛집을 찾는 것과 함께 유명한 브루어리(Brewery:양조장)를 찾아 그곳의 맥주를 마셔보는 것이 여행에서의 즐거운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끔 나파를 가게 될 때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와이너리를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는데 어찌 보면 무난하고 지루할 수도 있는 캘리포니아 생활의 소확행이다. 햇살 가득 내리쬐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며 양쪽 창문으로 바라보는 끝없이 줄지어진 포도나무의 풍경은 언제 마주 하더라도 마음에 여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느낌이 든다.
나파 밸리 근처에는 소노마(Sonoma)라는 또 다른 와인 농장 지역이 있다. 아무래도 거의 붙어있다 보니 나파 밸리와 많이 비교되는 곳인데 사실 나파보다는 훨씬 지역적으로 더 넓고 좀 더 와이너리들이 넓게 퍼져 있다. 간단히 비교하여 나파 쪽은 훨씬 더 상업화되어 있고 고급진 대형 와이너리들이 많다면 소노마는 여유가 넘치는 시골 느낌에 가족 단위로 운영하는 소규모 와이너리들이 많다고나 할까. 나파가 세련된 관광지 느낌이라면 소노마는 소박하고 한적한 교외 느낌이다. 아무래도 좁은 지역에 관광 쪽으로 많이 발달되어 사람들이 집중되는 것이 나파 쪽이다 보니 주말에는 나파의 유명한 와이너리들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몰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실 현지인들이 주말에 와이너리를 방문할 때는 붐비는 관광객을 피하고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 소노마를 많이 찾기도 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금문교를 건너 조금만 가면 탁 트인 드 넓은 포도밭의 소노마 풍경을 금방 만날 수 있다. 한 마디로 소노마 쪽은 사람이 붐비는 나파를 피해서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벗 삼아 피크닉 겸 와인 나들이 가기 괜찮은 동네라고 할 수 있다. (Fun fact - 나파를 얘기하면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와인 트레인 (Wine Train)인데, 말 그대로 열차를 타고 달리는 레스토랑 안에서 고급 와인과 전문 셰프가 만들어내는 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관광코스이다. 참조)
Beer is made by men, wine by God.
나파 밸리에는 수없이 많은 와이너리들이 있다. 나파와 소노마를 합쳐서 거의 천여 개의 와이너리들이 존재한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나파와 소노마를 합쳐서 가본 와이너리가 스무 군데도 되지 않으니 아마 평생 이곳에 산다 해도 반에 반에 반도 아마 못 가볼 듯싶다. 이 수많은 와이너리들의 생김새가 어떤 어떤 곳은 성채같이 웅장한 곳도 있고, 어떤 곳은 동화에 나오는 예쁜 마을 집 같은 곳도 있으며, 교회같이 생긴 곳도 있고 또 헛간을 개조한 것같이 허름한 곳도 있으니 그야말로 각양각색인 것이 새로운 와이너리를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있다. 나파 밸리에 와인 시음이라는 관광 문화를 만들고 지금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키워낸 로버트 몬다비 (Robert Mondavi)의 와이너리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본 곳들 중에 좋았던 곳들을 뽑아보자면 브이 사뚜이(V. Sattui), 까스텔로 디 아모로 사(Castello di Amorosa), 헨드리(Hendry), 아테사(Artesa)등이 있는데 이 중에 까스텔로 디 아모로사는 이태리어로 '사랑의 성'이라는 아주 뷰티풀 한 뜻의 이름인데 멀리서 친구나 가족이 놀러 오면 꼭 데려가는 곳이다. 중세 시대 느낌의 웅장한 성채로 되어 있어서 관광하기에 멋있는 것도 있지만,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라 판타지아(La Fantasia)라는 디저트 와인은 한번 시음해보면 무조건 한 병은 사가게 되는 정말 미친 와인이다. 달달한 디저트 와인이기에 평소에 와인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데, 와이너리 이름처럼 사랑이 샘솟는 판타스틱한 맛이랄까.
나파에서 위쪽으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욘트빌(Yountville)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이곳의 다운타운에 가면 이쁜 길을 가운데 두고 고급진 식당들이 즐비해 있다. 사실 나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아무래도 좀 높다 보니 이쪽에는 가격이 센 식당들이 좀 많은 편이기도 한데 아무튼 그중 가장 유명한 프렌치 런드리 (The French Laundry)라는 최고급 미슐랭 3 스타 식당이 있는데 바로 미국의 레전더리 셰프 토마스 켈러(Thomas Keller)의 식당이다. 미국인 셰프로서는 최초로 미슐랭 3 스타를 받은 셰프인데 프렌치 런드리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는 부숑(Bouchon)이라는 미슐랭 1 스타의 식당을 하나 더 갖고 있다. 심지어 뉴욕에도 미슐랭 별 3개를 받은 식당을 갖고 있을 정도인데 미국에서 유일하게 미슐랭 3 스타 식당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정말 어마어마한 오너 셰프이다. (혼자서 미슐랭 별 7개를 받은 셈이다!) 아무튼 프렌치 런드리는 2003년과 2004년에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1등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엄청 고급 지고 비싸기로 유명해서 옐프(Yelp)라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리뷰 사이트에 보면 이 식당 리뷰 사진에 음식 사진뿐이 아니라 영수증 사진을 올려 얼마가 나왔는지를 인증하기도 한다. 언제쯤 나도 한번 가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Fun fact - 미국에는 미슐랭 3 스타 식당이 14개 있는데 그중에 무려 7개가 캘리포니아에 있고 7개 전부 북가주에 위치한다. 5개는 뉴욕에 있고 나머지 2개는 시카고에 있다. 출처)
마지막으로 내가 강추하는 나파 여행 당일치기 관광 코스를 공개하기로 한다.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고 전부 워낙 유명한 곳들이라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들이다. 그래도 이 순서대로 이동하면 29번 국도 한길로만 쭉 올라가면 되고 일직선으로 길이가 총 25마일 밖에 되지 않아(약 40km) 동선 낭비 없이 아주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와이너리들이 보통 4-5시면 영업을 종료하기 때문에 시간을 잘 배분해야 한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하루에 네 군데를 다가 보기는 좀 무리일 수도 있는데 이중에 두세 군데만 골라서 집중 투어/테이스팅을 즐기며 여유롭게 보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옥스보우 퍼블릭 마켓(Oxbow Public Market) - 나파의 다운타운에 있는 가게인데 파머스 마켓 느낌으로 로컬 감성을 느낄 겸 살짝 들러보면 괜찮다. 다양한 음식들과 지역 특산품들을 많이 팔고 있다.
부숑 베이커리(Bouchon Bakery) - 욘트빌에 위치한 빵집. 위에 언급한 부숑 식당과 붙어있으며 역시 토마스 켈러가 운영하는 베이커리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다. 빵과 커피를 사기 좋은데 단점은 줄이 조금 길 수도 있다.
나파 밸리 환영 사인(Welcome to Napa Valley Sign) - 관광객이라면 이곳에서 인증샷 한장은 찍을 만 한데 사인이 엄청 이쁘고 멋있다거나 한건 사실 아니라서 실제로는 보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몬다비로 가는 길 중간에 도로 왼편에 있다.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 말이 필요 없는 나파의 아버지 몬다비의 와이너리이다. 오크빌(Oakville)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브이 사뚜이(V. Sattui) - 와이너리 중에 유일하게 바베큐를 팔고 그걸 사서 피크닉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점심때쯤 이곳을 방문하면 좋다. 테이스팅 비용도 다른 와이너리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고 날씨만 좋으면 아무데서나 막 찍어도 사진도 정말 예쁘게 잘 나온다.
버린저(Beringer) - 버린저 빈야드는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 나파 밸리 지역에서 가장 예쁜 와이너리 중 한 곳이 아닐까 싶다. 와인보다는 와이너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까스텔로 디 아모로사(Castello di Amorosa) - La Fantasia!
애드 혹(Ad hoc) - 와이너리 투어를 다 마치고 다시 부숑이 있는 욘트빌 쪽으로 내려오면 애드 혹이라는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의 느낌 있는 저녁을 추천한다. 이곳 역시 토마스 켈러의 식당인데(!) 메뉴는 코스로 정해져 있으며 매일 음식이 바뀐다. 사실 욘트빌로 다시 오면 식당이 많아서 고민이 될 텐데, 애드 혹 말고 레드 우드(Redd Wood)나 비스트로 진티(Bistro Jeanty)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