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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SMIN Jul 25. 2020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개인적 삶의 태도가 되는 그날을 위하여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오직 물리학과 생물학 만을 가지고 답하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의 문제를 경제적 원리만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인간이란 오랜 시간, 우연적 확률에 의해 고도화된 화학적 조합과 반응의 결과이며, 지구라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물리적 대응 전략이 체화된 종합적 산물이다'라고  답하는 것처럼 극단적이고 기형적 사고의 시대를 산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 불행한 존재의 육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라고 말하지요.  <굿워크,  E.F. Schumacher, 느린 걸음>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

삶의 순간 중 난관을 맞이할 때면 수 없이 많이 들어 본 구호이고 요구다.  
과학적 측면에서 풀이한다면, 인간을 단지 화학적 물리적 우성 인자를 얼마나 지녔는가로 구분하고 만약 <열등>하다면,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라고 하는 뜻의 말일 것이다. 개인적 열정의 측면에서 풀이한다면, 너는 왜 그래, 열심히 좀 살지...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가 들어온 <최선>은 늘 <풍요>로 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패배자요, 도태될 열등한 존재다>의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최선을 대해 살아남아라'라는 것이다.  그 풍요로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언제나 최선의 결과인 <발전>이었다.

발전은 <내용>은 없지만 한 가지 강력한 <기능>이 있다.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과정 상의  어떠한 일도 정당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발전이라는 기능에는 감정이 없어서 사바나의 법칙처럼 무자비함을 내포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발전>하면 <최선>을 다한 것이고, 그것의 결과로 <풍요>가 따라올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이것이 자본의 무서운 모습이기도 하다. 당부의 말처럼 들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는 자칫 잘못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삶을 무시한 냉혈적 표현의 교묘한 변형과 다름 아니게 해석되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오직 경제발전 만을 위해 살아왔고,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재분배를 위한 성장통을 겪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 질서 속에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소위 선진국들이 부르짖고 있는 <세계화>라는 큰 흐름에 편입한 것이다. 마치 '세계화'는 <세계가 활짝 열려 가능성이 많아졌으니, 네 능력대로 한번 마음껏 경쟁하며 부자가 되어 보라>고 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치명적 올무는 늘 달콤한 미끼와 함께 있는 법이고 가능성의 얼굴로 와서 고통의 시간을 요구하다가 절망의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기 마련. 세계화는 거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작금의 우리.


<발전>하여 <풍요>가 우리 앞에 와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하며, 자본이 광풍처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빈곤>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길이 없다. 최소한의 제도적 치유방법을 요구하고 있지만, 예부터 그랬듯이 남아 썩을지언정 곳간의 양식은 곳간 문을 쉽게 나서지 않는 법이다. 올해 초, 상위 10%의 종합소득의 규모가 나머지 90%를 모두 합친 종합소득 규모의 최소 106배에서  최대 198배에 달한다는 발표가 쪽지뉴스처럼 보도되었다. 그들의 깔때기는 더 많은 것을 더욱더 효율적으로 빨아들이는 데, 전 세계에서 경제규모가 10위 권으로 <발전>하였다 이야기한다. 몇 년 전 8위에서 10위로 밀렸다는 첨언과 함께.


왜, 최선의 노력은 90%의 보통사람들만 해야 하는 것일까?

깔때기 같은 10%의 목구멍으로는 재화뿐만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의 삶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아빠 엄마들의 이야기와 가족들의 풍경과 감정까지 빨려 들어가, 표정 없는 얼굴들을 낳고 있는데 말이다.  <돈의 속성>을 이야기한 김승호에 따르면 돈에도 인격이 있다 하는데, 과연 그것은 어떠한 인격일까 싶다. 왜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최선을 대해 살아남아라!”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신자유주의 무역 질서가 말단 말초신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즘, 이러한 불만과 안타까움이 진정 세계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남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개인적 열정에 기인한 삶의 태도가 되는 것.


그러한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아마도 진정한 선진과 발전의 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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