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독백
마음의 빈자리.
그걸 무작정 채울 일 만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 방하나를 찾는 일은 또 다른 발견일 터.
그 빈자리가 상실에 의한 공허함인지, 내적인 열정이 만들어낸 여유의 공간인지 먼저 정확히 할 일이다. 또 그 빈자리가 온기 넘치는 공간인지 냉기 가득한 빈자리 인지도 살펴볼 일이다.
문득 예고 없이 오고 가는 감정들이 어떤 방에서 나왔든 그것들은 모두 나의 또 다른 표현일 뿐. 그런 점에서 그 방들의 공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 만도 아니다. 사람의 빈자리가 그리움을 쏟아 내듯, 우주의 빈 공간이 암흑물질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듯, 그렇게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은 창조의 씨앗이며 역설적이게도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적 질량일 것이다.
공백은 무엇으로든 채워지는 법.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러한 공백을 결핍으로 오인하고 그 부족함을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힘들어한다. 한번 시작된 감정의 동요는 빈 곳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무엇으로든 채워간다. 공백이 조급함으로 오염될 때 생산적 장소는 불균형의 출발점이며 자학의 단두대이며 탐욕의 저장소가 된다. 크나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경우 그럴 확률은 더욱더 커진다. 내가 그렇다. 생각은 이상에 살고 몸은 현실에 사니 당연한 일일 터지만 그렇다고 냉기 가득한 상실의 공간으로 마음의 방을 방치하듯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여기 이렇라도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나는 집을 짓는 일을 한다.
지하의 물이든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든 물은 낮은 곳으로 그리고 가장 취약한 곳으로 성실하게 파고든다. 양이 많을수록 압력이 높을수록 더욱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물을 스며들게 하고 흐르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의도된 방향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함께하는 것이다. 한기 넘치는 방이든 온기 가득한 방이든 스스로의 삶과 존재에 대한 충만함을 순수하게 누리려면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해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물을 다루듯 해야 할 터다. 하지만 한번 기울어진 마음속 방바닥은 쉽사리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절박함과 초조함으로 채우고 있는 나를 대면하는 것은 사실 거부하거나 외면하고픈 사실 중 하나다.
빈 자궁에서 생명이 자라듯 비어있음에 대해 좀 더 너그럽고 느긋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차피 영원하지 않을 충만함이라면, 그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키우다 크게 배신당하느니, 그리움을 채우는 빈 방이든, 미쳐 이루지 못한 열정의 공터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일이다. 그 역시 내 모습임을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사랑이 시와 예술을 잉태하듯 부재의 냉랭함과 상실의 공허함, 현실의 비수가 스스로를 해치지 않도록 돌볼 일이다. 그 공백의 자리가 내게 처음부터 없던 빈자리인지, 아직 채우지 못해 비어있는 자리인지, 혹은 있던 것을 잃어버려 비게 된 자리인지 관계없이 칡흙 같은 어둠 속에서 거꾸로 자라온 10개월처럼 나의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할 자궁이라 여기며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사람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숨겨져 있단다.
내속에 있을 그 세상이 그럼에도 살만한 세상을 꿈꾼다면 그만큼 마음을 단단하게 붙잡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