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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SMIN Apr 26. 2022

우리가 몰두하는 것들

축복일까? 혹은 불행일까!

의식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3대 요소인 것인지 혹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3가지 방법인지 의문이 든다. 요즘이 그렇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검색되고, 소비되는 대다수의 이미지나 영상은 먹을 것, 입을 것, 집을 꾸미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근길. 눈만 돌려도 눈에 들어 오는 상대방의 스크린에는 여지없이 음식 사진이나 미용 혹은 의류 쇼핑을 위한 화면이다. 그도 아니면 가구 등의 구매를 위한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필요를 충족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의미가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본말이 전도된다면 한번 생각해 볼 일임에 틀림이 없다. 욕망은 그것 외의 모든 것에 대하여 폐쇄적이다. 욕망은 자신의 증식 이외의 모든 것들을 먹이로 삼거나 높은 담장을 쳐 결국 스스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물론 욕망이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 처벌을 받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채워지지 않을 독에 물을 붇듯 자기 소모적 행동을 이어간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들은 어떨까?

미래에 도전이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이 욕심으로 읽혀서는 안 되겠지만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할 일이다. 기독교적 윤리나 사회적 규범에 따라 살펴야 할 일이란 의미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혹은 지구 상의 생명체로써 가져야할 기본적인 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오랜 시간 촘촘하게 관계를 맺으며 생을 영위해 왔다. 그 관계는 미세하게 조정된 균형으로 태초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그러나 인류세의 시작과 함께 이러한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 했고, 그 시작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의 ‘준비’라는 지극히 작은 필요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그러나 지구와 같은 제한적인 영역에서  한 쪽의 적대적 증가는 반드시 다른 쪽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기도 하다.


나의 필요가 그 한도를 넘을 때, 혹은 그 한도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키워 갈 때. 자원의 쏠림은 당연히 부족이나 고갈을 동반한다. 밀물은  물의 총량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물이 한쪽에 몰린 것이다.


한 해. 버려지는 음식물과 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용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더욱더 착잡하다. 만드는데 드는 비용과 버리는데 드는 비용. 이것에 대한 최소한의 균형을 인류가 고민한다면 적어도 수 많은 곳에서 어린아이들과 궁핍한 환경에 놓여있는 이들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의식주 아니 인간의 욕망에 대한 현대인의 민낯.

욕망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다양한 방법은 물론 누군가에게는 생명인 그것에 대하여 놀이로 변질시키는 다양한 영상들이 넘쳐나는 지금. 하루하루의 일상을 대하는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할 때다. 필요가 욕심으로 욕심이 쾌락으로 그리고 그 쾌락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언덕길을 달리는 것처럼 어딘가에 부딪쳐야만 멈출 것이다. 육체가 부서지든 정신이 망가지든 혹은 둘 다이든, 문제는 충격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속도가 붙기 전에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멈춰 서야 한다.


성경에 욕심은 바라봄에서 난다 했다.

욕심이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 했다.


이러한 상황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풍족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그 우려되는 삶에 이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진정 그렇다.


최근의 삶 속에서 나는 박탈과 부족이 가져온 다양한 증상에 힘들어 왔었다. 삶의 대부분에 대하여 혹은 한 평생의 노력에 대하여 늘 상실의 아픔을 겪어 왔다고 생각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 까에 대하여, 언제나 답은 나의 부족함과 무능이 이었다. 현재도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범죄 후 들키지 않도록 숨겨둔 흉기가 있다. 그 흉기를 언젠가는 사용하리라 다짐하며, 그 시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이다. 박탈과 부족에 대한 나의 답으로 말이다.


과연 이것은 나에게 불행일까? 아니면 축복일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너무도 쉽게 ‘축복’이란 답이 기계적으로 내려진다. 아직 나의 속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이 ‘틈’에서 ‘거리’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혹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답을 구해 보고 싶다.


가슴 한 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 원인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인지 아니면 그 ‘틈’이 점점 벌어져 가는 대서 오는 아쉬움이나 불안함인지는 모르겠느나 분명한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어봐야 그 곳의 삶에 대해 이해한다.   현장이 곧 답이라는 것이다. 치열한 현장,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 이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며, 몰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 있게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다시 한번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어늘도 도움을 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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