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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un 13. 2021

초여름

바깥에 나가면 공기가 후끈하면서 끈적하고, 어느새 해는 꽤 길어졌다. 한낮에는 햇볕이 예사롭지 않다. 집에 가만히 앉아 창을 넘어오는 뜨거운 햇살을 외면한다. 타타타- 소리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이 그나마 믿을 구석이다. 주말이라도 된다면, 슬슬 불어오는 바람에 햇살을 보며 나른해지곤 한다. 꾸벅꾸벅 졸다가 살짝 더위에 지쳐 깬다. 대나무 돗자리에 약간의 끈적함이 묻어난다. 입이 텁텁해 나가 보니 감자가 식탁에 올려져 있다. 


저 감자는 내가 삶아놓은 것이었는데, 어느새 어머니께서 초여름마다 삶아주시던 감자가 놓여있다. 지금이 몇 살이지. 월계동인가. 감자를 바라보다, 추억 속 한 순간으로 들어왔다. 잘 삶아졌다. 달달하고 고소한 여름 감자 냄새가 난다. 뜨끈하고 포슬포슬했던 여름날 감자들이 떠오른다. 항상 빛바랜 손잡이의 회색 냄비에 삶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껍질을 벗겨놓지 않고 삶아 손을 호호 불어가며 감자 껍질을 까서 먹었다. 그때도 오늘 같은 여름 햇살이 나른하게 내렸다.


감자를 먹고 조금 빈둥거리다 보면 금세 저녁 시간이 되었다. TV엔 슬슬 볼만한 만화가 한두 편 시작했고, 아파트 옆 공터에선 아이들이 축구에 열을 올린다. 아직 해가 떠있으나 밥 짓는 소리와 도마 위로 무언가 썰어내는 소리가 울린다. 저녁 준비에 한창인 부엌을 뒤로 한채 나도 공터로 나갔다. 늘 보는 동네 꼬마들이라 무리에 섞여 공을 차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며 붉어진다. 아파트 복도에 선 어머니도 보인다. 올라오라며 손짓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동감 넘친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다.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가 잔잔히 들려온다. 창문을 열고, 어둑하지만 푸르고 깊어 마치 바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여름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후끈했던 바람은 살짝 선선하게 다가온다. 그 안에는 흙이나 물 비린내 같은 것이 살짝 섞인 풀냄새가 섞여온다. 여름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무위에 빠져들게 된다. 괜스레 있지도 않은 시골 고향집에서 여름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무료한 기분에 밤 산책을 나가보니 아직은 열대야가 찾아오지 않는 여름밤. 그 향기가 시원했다.




장을 보다 문득 감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여름의 열기를 담아 삶은 감자는 이 시기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나 보다. 감자를 삶아놓고 보니 이 계절이 문득 선명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 생각도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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