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착각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의 감정을 혼동하고 심취해 마치 본인이 좋은 사람인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지요. 그 감정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공감'과 '동정'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타인을 동정하고 있을 때를 '주제넘는 짓'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감정을 토대로 감정의 착각에 관해 말하고자 합니다.
몇 주 되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첫째 오빠, 그러니까 의붓오빠의 친구들을 장례식장에서 본 이후에 딱 세 명만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첫 째 오빠의 절친이었기에 믿고 갈 수 있었지요. 비가 오고 습하고 꿉꿉한 날이었습니다. 죽은 오빠의 이야기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었지요.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신 것 같은데요. 그중 한 명이 제게 가끔 가다 고민 있으면 연락 하라며, 지인으로 지내자고 번호를 달라고 하길래 흔쾌히 승낙했지요. 마침 그때는 제 첫째 오빠의 절친이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게 문제였던 것인지, 제가 의붓동생이라 무시를 한 것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분노만 하네요.
제 번호를 물어본 첫째 오빠의 친구는 중학교 동창일 뿐, 저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제 의붓오빠가 살아생전 친구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친한 친구들만 저를 소개해줬거든요. 아무튼 저는 그분에게 번호를 주고, 집에 갈 때 필름이 거의 끊겨 택시에 실려간 기억만 납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문제는 당일과 그 다다음날까지였습니다. 잘 들어갔냐며, 술은 조금만 마시라며, 편히 쉬라는 새벽 3시의 카톡은 그렇다 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집에 들어간 시간이 딱 그 시간대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의 시발점은 제가 오후까지 자다가 일어났을 때부터입니다. 오후 4시경에 전화가 오더군요. 당연히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죽은 오빠의 친구로만 대할 뿐이고, 전혀 이성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다음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다음날의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며, 가끔 가다 밥을 사주겠다고 연락하라는 그 카톡에 화가 났습니다. 문제는 그 문자를 보낸 시간, 그리고 쓸데없는 전화였지요. 저를 이성적으로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너무 화가 나서 감정을 조금 추스른 다음에, 그날 아침에 이렇게 답장을 했지요.
"저기 죄송한데요. 저는 지인으로 지내자는 의미에서 번호를 드린 거고, 저는 00 오빠의 동생입니다. 00(절친) 오빠의 동생이었어도 이렇게 호감 표시를 안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굉장히 불쾌합니다. 제가 그날 무슨 호감 표시를 드렸나요? 저는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드린 것만 기억하는데요. 혼자서만 오해 안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죽은 오빠의 체면을 생각해서 굉장히 무미건조하고 정중하게 보냈지요. 이내 그분은 대략적으로 오해인 것 같다. 가끔 가다 00이 생각나면 네 생각이 났다면서, 어떤 게 널 오해하게 하고 불편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고 불편하면 연락은 안 하겠다고요.
같잖았습니다. 제가 어떤 가족사를 지니고 있는지 몰랐더라면 그분은 저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키 작은 남자일 뿐이죠. 그리고 혐오스러웠습니다. 감히 누구를 만만히 보고 있는지, 주제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급으로 나누면 안 된다고 하지만, 격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격 떨어지는 행동을 그 나이 먹고 한다는 자체가, 그리고 왜 하필 제 죽은 오빠의 이름을 빌려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고 분노했습니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더군요.
이 사실을 캡처해서 죽은 오빠의 절친에게 보내면서 굉장히 불쾌하고 화가 난다고, 제 오빠가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했겠냐고, 심지어 전화도 하던데 이게 대체 무슨 경우냐고 화를 냈는데, 돌아오는 답장은 제가 오해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명백히 저를 무시한 언행이기에 더 이상 첫 째 오빠의 친구들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끔 가다 사람들이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공감을 기반한 동정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여러분, 공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감이란 그 사람의 감정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사람의 상황을 나에게 대입해 그 감정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위로를 건네주거나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이지요. 고통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정은 무엇입니까? 남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저변에는 타인을 나보다 낮게 보고, 그러니까 내 처지보다 불쌍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불쾌한 단어이지요. 이게 바로 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 죽음까지 내몰 수 있는 명백한 차별입니다. 네, 차별이 맞습니다. 남들을 쉽게 동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타인보다 언제든지 안 좋은 상황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남들의 처지를 듣고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버릇은 불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꼴을 우습게 만들거든요. 자신에게 반드시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죠. 이런 소소하고 저열한 행동들이 그 사람의 품격을 떨어트리고, 편견으로 판단하게 만듭니다. 예로부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주제를 알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야.'라고 자존감을 깎으라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 인생도 언제든지 바닥으로 꺼질 수 있어. 지금 밑바닥보다 더 밑바닥을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준비해야 돼.'라는 마음 가짐을 새기라는 뜻입니다. 저는 화가 납니다. 이런 진리조차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저를 동정할 때, 너무 화가 납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거쳐가면서, 혹자는 좋은 사람으로 알고, 혹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 혹자는 만만한 사람, 혹자는 불쌍한 사람으로 저를 판단합니다. 이 중에서 저를 가장 화가 나게 하는 건, 저를 불쌍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저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불쌍하게 여긴다는 건 타인을 깎아내리는 행위이기에, 저는 사람을 쉽게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견디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그 힘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이걸 자존감이자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릅니다. 단언컨대 남들을 쉽게 동정하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아, 남들을 깎아내려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들죠. 나를 밑으로 끌어내리는 존재들입니다. 무시해야만 하죠. 그럼에도 화가 납니다. 한낱 파리조차도 안 되는 같잖은 존재가 저를 동정하다니요.
여러분, 제발 주제를 아십시오. 남들을 깎아내려 자존감을 채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렇게 추잡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발 공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사람을 동정하는 건 공감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뇌신경학자가 낸 책 중에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공감하는 법을 모르겠다면 학습이라고 해서 익히세요. 공감도 지능입니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지능이 낮다는 반증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뼈에 새기십시오.
"너 자신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