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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Aug 21. 2020

죄송합니다. 오늘은 빵을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빵집에서 빵을 굽다 보면 갖가지 실수를 범하게 된다. 넣어야 할 재료를 빠트릴 때도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금이다. 어떤 때는 빵 성형에 집중하다 오븐에서 빵 꺼낼 타이밍을 놓쳐 '아 오븐에 빵!' 하는 순간 오븐 속에서 새까맣게 탄 빵을 꺼내야 때도 있다. 잠이 덜 깬 새벽 시간, 잠깐 정신줄을 놓는 순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다. 빵집에서는 많은 반죽으로, 다양한 빵을 굽기 때문에 이런 실수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특정 빵에만 영향을 준다. 문제가 생긴 빵은 아깝지만 버리면 된다.


하지만 빵 만드는 설비가 오작동하기라도 하면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가끔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 도우콘, 즉 냉장 발효기이다. 


사실 냉장 발효기만큼 베이커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발명품은 없다. 빵이 주식인 서양에서는 아침으로 당연히 빵을 먹는다. 프랑스 동네 빵집의 진열대엔 아침 일찍 오븐에서 갓 나온 바게트가 올라간다. 아침 식사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바게트는 적어도 새벽 6시 이전에는 오븐에서 나와 있어야 할 것이다. 자 그럼 새벽 6시에 바게트가 오븐에서 나온다는 가정하에 베이커는 대체 몇 시부터 빵을 준비해야 하는지 추정해 보자. 방법은 간단하다. 제빵 공정을 거꾸로 되짚어가면 된다. 가장 단순한 바게트 제빵법을 기준으로 해보자. 굽기 30분, 칼집 넣기와 오븐에 넣기 10분, 2차 발효 1시간, 분할과 성형 30분, 1차 발효 3시간, 계량과 반죽 30분.  총 5시간 40분이 걸린다. 중간에 다른 작업의 방해 없이 오롯이 바게트만 굽는다는 가정하에 이렇다는 말이다. 새벽 6시에 빵이 나오려면 베이커는 늦어도 자정쯤에는 빵집에 나와 있어야 한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사전 반죽법으로 바게트를 구울라치면 베이커가 빵집에 나오는 시간은 더 앞으로 당겨질 것이다. 


이 동네에선 저녁에도 빵을 먹어야 하니 저녁 즈음에도 바게트를 구워야 한다. 저녁 6시에 바게트를 다 굽는다고 가정하면 정리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저녁 7, 8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아침 식사용 바게트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19세기 파리의 베이커들을 노예라고 불렀다고 한다. 햇빛을 못 봐 온 몸에 뒤집어쓴 밀가루처럼 희멀건한 얼굴을 한 노예. 


이들의 비참한 삶을 극적으로 개선한 발명품이 바로 냉장고 즉 냉장 발효기이다. 베이커들은 이제 저녁과 다음날 아침에 구울 바게트 반죽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다. 저녁용은 발효해서 바로 굽고, 다음날 아침용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일찍, 대략 4시 반쯤 느지막이(?) 빵집에 나와도 6시에 갓 구워진 따끈한 바게트를 손님에게 내어놓을 수 있었다. 냉장고의 발명은 좁은 빵 공장에서 쪽잠 자는 고된 삶으로부터 베이커들을 해방시켰다. 


헌데 베이커들의 워라밸을 극적으로 향상한 그 냉장 발효기가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냉장 발효기는 다양한 모드로 복잡하게 설정하여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핵심 기능은 단순하다. 냉장고처럼 특정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면 된다. 근데 가끔 가다 이 녀석이 엉뚱한 일을 하기도 한다. 새벽에 빵집에 출근하여 발효기를 열었는데 반죽통 뚜껑을 밀치고 올라와 폭발해 버린 반죽. 이건 볼 것도 없이 발효기 온도가 높게 올라간 탓. 냉장 발효기의 스크린을 올려다보면 설정해 놓은 온도보다 훨씬 높은 얼토당토않은 온도를 표시하고 있다. 


이런 날은 빵집 문이 일찍 닫힌다. 그리고 빵집 출입문에는 이런 안내문을 내건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빵을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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