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마켓까지 뻗은 나의 마수
맹세코 소개팅 앱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만났던 남자들 중 단 한 명도, 진심으로 싫어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물건 사이즈가 얼만한지 아냐고 물으며 궁금하면 휴지심을 가지고 와 보라던 남자도 싫지 않았다. 그냥 웃겼을 뿐…
그런데 이 사람. 무명. 무명이라 칭 하겠다.
이 사람만큼은 싫다. 화가 난다. 이상하리만치 화가 난다.
그저 집 안에 굴러다니는 필요 없는 허리 안마기를 처분할 생각이었다. 브랜드 이름만 유명할 뿐인 이 기구는 충전식이 아니라 콘센트에 꽂은 채로 사용해야 하며 그저 그런 진동에 온열 기능만 있으면서 제대로 된 물건 인척 인터넷엔 제법 비싼 가격으로 올라와있는 녀석이었다.
이런 걸 돈 주고 팔자니 양심에 찔려 무료 나눔을 결심했다. 어차피 전 남편이 시댁에 안마 의자를 사주며 사은품으로 딸려온 녀석이었고, 시어머님도 진즉 이 녀석의 쓸모없음을 간파하고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무료 나눔을 천명하자 즉시 한 열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눔을 요청했지만 딱 한 사연? 딱 한 사람만이 부모님과 같이 쓸 것이라고 했다.
그래. 이 사람에게 주면 세명이 쓰겠구나.
당장 다른 이들에겐 거절을 알리고 그 사람에게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런데 그거 상태 깨끗한가요?”
아니 사진 보면 모르나…
“네 얼마 쓰지도 않고 거의 새 거예요.”
“아니 부모님이 같이 쓰실 거라 깨끗해야 해서요.”
“네. 사진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깨끗하고요. 상태 좋습니다. 혹시 좀 꺼려지면 다른 분이 당장 가져가실 수 있다는데 그분 드려도 될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부모님이 같이 쓰실 거라 좀 걱정돼서요.”
“그러면 괜찮으니까 ○○역에서 몇 시에 가능하신지 시간 알려주세요.”
약속 한번 잡기 힘들다. 그냥 주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힘든 건가.
아무튼 정해진 시간에 역 앞에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에게 안마기가 담긴 종이백을 넘겨주고 헤어졌다. 그 시간이 2초 정도. 정말 물건만 건네주고 꾸벅 인사하고 집에 왔다. 상대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에 안경을 쓴 남자, 그냥 그 정도 인상이었다.
다음날 그에게 후기가 와 있었다. 너무 좋고 너무 감사하다고 보답으로 차 한잔 사드리고 싶다고.
그래? 좋다. 차 한잔 마시지 뭐.
[ 네 좋아요. 그럼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아 저는 오늘도 괜찮습니다.]
[그럼 제 번호는 0000 에요. 연락 주세요]
[와 굉장히 화끈하시네요.]
뭐 화끈할 것 까지야.
그는 카톡을 추가해 바로 내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카톡으로 약간의 대화를 했다.
그는 IT회사에서 일을 하는 회사원이었고 난 재택근무를 하는 디자이너라는 정도의 간략한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난 이미 마음속으로 오호라… 이 녀석 괜찮으려나? 싶은 마음에 다시 전투복, 그러니까 딱 붙는 티셔츠에 뽕브라를 하고 약간의 메이크업을 하고 역으로 나갔다.
그는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워낙에 운동복 바람에 머리도 덥수룩하게 하고 나갔거든.
“아니 원래 재택근무할 때 그렇게 꾸미고 일해요?”
설마 그럴 리가? 난 뭔가 발끈한 마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남자 만난다고 꾸미고 나온 건데요.”
그런 대사를 남기고 앞장서서 카페로 향했다. 안 바라봐도 뒤통수로 당황한 그가 느껴졌다.
나란히 앉는 바 형식의 테이블로 자릴 잡은 우리는 자몽에이드를 두 잔 시켰다.
그는 음료를 마시는 때 외에는 마스크를 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답했다.
“나이는 묻지 마세요. 나이 먹으니까 젊었을 때 못했던 게 생각나고 억울해서 이제 나이는 잊어버리고 살려고요. 보나 마나 은도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거예요.”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실 것 같은데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은도씨는 어디 가서 20대라고 해도 믿을 거예요.”
“왜 저한테 사회생활을 하고 그러세요? 너무 사회생활에 찌든 것 아니세요?
참내… 나이를 내려 말해도 정도가 있지.. 그와의 대화는 별거 없었다. 그가 너무 방어적이었기 때문에. 나이도 이름도 말하길 주저했으며 안마기가 깔끔하냐고 물어봤던 것도 당근 마켓에 하도 이상한 사람이 많아 나를 떠 보기 위한 것이랬다.
집에 돌아와 그는 오늘 너무 즐거웠다며 톡을 보냈다. 반면에 난 그가 남자로는 별로였기에 동네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는 괴로워하며 잘 돼가는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며 적응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며 자기 전엔 톡으로 내 눈빛이 아른거려서 설레서 잠이 안 온다고...
[무명 씨, 무명 씨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내가 좋다고 해요. 나도 무명 씨에 대해 아는 게 없고요. 난 무명 씨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몰라요.]
그제야 그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말해 주었다. 나이도 나보다 두 살밖에 안 많으면서 뭐 그리 우는 소리를 한 건지. 40대가 되면 뭐 죽나? 40대가 되면 인생 끝난 건가? 뭐 그렇게 죄가 많아 40대인걸 숨기나? 40대가 되면 그렇게 대역죄인처럼 세월에 쫓기는 도망자가 되어 나이도 숨기며 살아야 하는 건가?
그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내게 관심을 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어를 했다. 이렇게 네가 좋지만 너는 내게 관심 없겠지. 이런 식.
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몇 번 만나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 단정하지 않고, 편하게 심심할 때 만나서 밥 먹자고 해도 자길 다시 봐도 자신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아니 어쩌라고!
그러면서 그의 구애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다는 둥. 심지어 호칭을 자기야로 바꾸었을 땐 그걸 말릴 기운조차 없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일종의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고 나도 누군가를 혼자 좋아했을 때 북 치고 장구 치던 모습이 있었기에 그의 갈등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빨리 자신에게 우리 집에 라면 먹으러 오라고 초대해 주길 기다린다고 했을 때,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다.
소개팅 앱 같은 가벼운 만남이 넘치던 곳에서 만난 이가 아니었기에 난 그에게 일종의 기대 같은걸 가졌나 보다. 하지만 이런 가벼운 대사로 난 또다시 가벼운 이야기 속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에게 경고했다. 별로 기분 좋지 않다고. 좋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나 보다.
어찌 됐든 그를 다시 한번 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날 공교롭게도 친구가 침대 매트리스를 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난 그 사이즈를 알기에 친구가 도저히 그걸 혼자 옮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는 극구 혼자 옮긴다고 했지만 난 결국 마음을 굳히고 친구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간 김에 친구네 집 창에 실리콘도 쏘아 주기로 했었기에 겸사겸사.
그는 서운해했지만 알겠다고 했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그에게 그럼 잠깐 얼굴이라도 보겠냐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라면 먹으로 오라는 초대는 아니라고.
[ 아 그래? 라면 먹으로 오라는 게 아니라니 아쉽다.]
아 진짜.. 한 번밖에 안 봤다고 우리!!! 난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지하철 의자에서 숨을 씩씩 몰아 쉬었다. 그리고 다신 말 걸지 말라며 대화방을 나갔다.
그는 다시 대화방을 만들어 [진짜 화났구나] 이 지랄을 하며 정말 미안하다고 당장 오겠다고 했지만 난 다시 톡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에게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심지어 난 며칠 후 분에 못 이겨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는 그를 카톡 차단까지 했다. 그러데이션 분노인가? 갈수록 더 화가 난다.
그는 비겁하다. 전력으로 부딪히고 솔직하게 대시한 적도 없으면서 내 거절이 무서워서 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내가 보자고 해야 용기를 내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자신은 보고 싶다고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내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했다.
무명 당신은 겁쟁이야! 그리고 비겁해. 게다가 사람을 너무 재면서 만나.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진상을 떨었지만 차단을 안 당한 거 보면 참 신기한 노릇이다. 어쩌면 무명의 그런 물렁한 태도에서 나 스스로의 모습이 보여 더 화가 난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솔직하고, 날 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난 진상이지만, 이 정도까지 비겁하진 않아!... 그렇다고 믿고 싶어.
이런 모든 사단을 불러온 진원지. 이 모든 구질 구질한 이야기가 있도록 만든 범인.
이제 그를 고발할 때가 온 것 같다.
바로 나 자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