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죽음의 무게
당시는 제법 쌀쌀한 계절이었다. 늦가을이었던가. 두툼한 카디건을 두르고 나갔어도 으슬으슬 추위가 파고들어서 선배 차에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정말 아무 사심 없이 올라온 거 맞죠?"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사심 없는 사람이 이렇게 새벽 몇 시간씩 운전해 온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 아무리 수도승 같던 선배라고 해도. 난 결코 선배가 남자로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사심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더랬다. 그러면서 외로움에, 선배를 보는 게 꽤 즐거운 이벤트가 될 것 같았다.
"네가 많이 걱정됐어. 이혼했다 하고 갑자기 연락한 것도 그렇고, 혹시 네가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올라온 거야."
정말 걱정한 거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불쑥 뿔이 올라왔다. 왜 이혼하고 오랜만에 연락해서 우는 소리하면 죽고 싶다는 것과 동의어로 추정되는 걸까. 내용은 우는 소리였지만 말투나 느낌은 명랑하고 장난스러운 컨셉이었는데... 이해가 안 된다. 전에도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와 이야기하다 이혼한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친구는 연락이 좀 안 되니까 걱정하면서 내가 안 좋은 선택을 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을 했었다. 심지어 우울하거나 어두운 기색을 비친것도 아니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왜 이혼하면 죽고 싶을 거라고들 생각할까. 이혼이 죽음과 비슷한 무게추를 달고 있다는 거야? 아니야.
이혼 후에도 삶은 있다. 이혼은 끝이 아니다. 적어도 숨이 붙어있는 한 모든 것은 시작과 끝, 과정이 얽혀있다. 왜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할까들. 가식적으로 고맙다고 한 자신에게도 불만스럽다.
적어도 선배에겐 이런 말도 안 되는 셈법을 돌려준 것 같다. 다만 이건 앞으로 있을 일이다.
선배와는 차에서 그간의 세월을 좁히는 대화를 했다. 선배는 어른스러웠지만 원래 20대 때부터 그랬기에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고 선배가 느끼기에도 그랬나 보다. 심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적인 건 PT와 헬스를 거치며 상승한 근육량을 의미한다. 심적으로는 내가 크게 성숙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20대 때 압도적으로 뭘 몰랐던 녀석이었기에 약간의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것이겠지.
"많이 변했다. 많이 이뻐졌고."
결혼 전이니까 한 십 년 전일까, 선배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 대학생 때 얼마나 촌스러웠는지 알아? 완전 코 찔찔이였는데. ㅎㅎ 그런데 앞으로 더 이뻐질 거야."
"어떻게요? 이제 삼십돼가고 계속 나이 먹을 텐데 어떻게 더 이뻐져요?"
"주변에 여자들 보면 그렇더라고 삼십넘고 하면 점점 더 이뻐져.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때의 나는 어렸기에(?) 나이 먹으면 안 이뻐지고 큰일 나는 줄 알았나 보다. 내 대답이 심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때의 나야 너도 나이 먹는다. 그리고 너 낼모레 사십이다.ㅋㅋ
지금의 나는 외모보단 사람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호감 가는 외형의 사람에게 맥을 못 춘다. 인생은 원래 모순이다.
어쨌든 정말 이뻐서 선배가 나한테 이쁘다고 한 걸까, 아니면 호감을 사기 위한 입 발린 말이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건 뭐가 됐던 중요치 않다는 거다. 나의 마음은 한결같이 선배에게 아무런 남자로서의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고맙다고만 하며 그 말을 넙죽 받아먹었다. 나이 먹으면 이렇게 낯짝도 두꺼워지는 효과가 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선배는 차가 막히기 전에 내려가 봐야겠다며 슬슬 마무리했다. 한 삼십 분 정도 같이 있었나.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 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산뜻하게 갈 길을 떠나는 선배에게 너무 고마웠다. 선배는 한방이 있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선비 같으면서도 의외의 박진감을 갖춘 선배가 꽤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마음 쓰였다.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됐다.
수 시간 후 선배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안심이다.
그리고 늘어지게 늦은 아침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