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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도 Jun 23. 2022

새벽을 달려온 선배

이혼과 죽음의 무게

당시는 제법 쌀쌀한 계절이었다. 늦가을이었던가. 두툼한 카디건을 두르고 나갔어도 으슬으슬 추위가 파고들어서 선배 차에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정말 아무 사심 없이 올라온 거 맞죠?"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사심 없는 사람이 이렇게 새벽 몇 시간씩 운전해 온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 아무리 수도승 같던 선배라고 해도. 난 결코 선배가 남자로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사심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더랬다. 그러면서 외로움에, 선배를 보는 게 꽤 즐거운 이벤트가 될 것 같았다.


"네가 많이 걱정됐어. 이혼했다 하고 갑자기 연락한 것도 그렇고, 혹시 네가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올라온 거야."


정말 걱정한 거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불쑥 뿔이 올라왔다. 왜 이혼하고 오랜만에 연락해서 우는 소리하면 죽고 싶다는 것과 동의어로 추정되는 걸까. 내용은 우는 소리였지만 말투나 느낌은 명랑하고 장난스러운 컨셉이었는데... 이해가 안 된다. 전에도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와 이야기하다 이혼한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친구는 연락이 좀 안 되니까 걱정하면서 내가 안 좋은 선택을 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을 했었다. 심지어 우울하거나 어두운 기색을 비친것도 아니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왜 이혼하면 죽고 싶을 거라고들 생각할까. 이혼이 죽음과 비슷한 무게추를 달고 있다는 거야? 아니야. 


이혼 후에도 삶은 있다. 이혼은 끝이 아니다. 적어도 숨이 붙어있는 한 모든 것은 시작과 끝, 과정이 얽혀있다. 왜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할까들. 가식적으로 고맙다고 한 자신에게도 불만스럽다.

적어도 선배에겐 이런 말도 안 되는 셈법을 돌려준 것 같다. 다만 이건 앞으로 있을 일이다.


선배와는 차에서 그간의 세월을 좁히는 대화를 했다. 선배는 어른스러웠지만 원래 20대 때부터 그랬기에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고 선배가 느끼기에도 그랬나 보다. 심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적인 건 PT와 헬스를 거치며 상승한 근육량을 의미한다. 심적으로는 내가 크게 성숙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20대 때 압도적으로 뭘 몰랐던 녀석이었기에 약간의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것이겠지.


"많이 변했다. 많이 이뻐졌고."


결혼 전이니까 한 십 년 전일까, 선배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 대학생 때 얼마나 촌스러웠는지 알아? 완전 코 찔찔이였는데. ㅎㅎ 그런데 앞으로 더 이뻐질 거야."

"어떻게요? 이제 삼십돼가고 계속 나이 먹을 텐데 어떻게 더 이뻐져요?"

"주변에 여자들 보면 그렇더라고 삼십넘고 하면 점점 더 이뻐져.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때의 나는 어렸기에(?) 나이 먹으면 안 이뻐지고 큰일 나는 줄 알았나 보다. 내 대답이 심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때의 나야 너도 나이 먹는다. 그리고 너 낼모레 사십이다.ㅋㅋ  

지금의 나는 외모보단 사람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호감 가는 외형의 사람에게 맥을 못 춘다. 인생은 원래 모순이다.


어쨌든 정말 이뻐서 선배가 나한테 이쁘다고 한 걸까, 아니면 호감을 사기 위한 입 발린 말이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건 뭐가 됐던 중요치 않다는 거다. 나의 마음은 한결같이 선배에게 아무런 남자로서의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고맙다고만 하며 그 말을 넙죽 받아먹었다. 나이 먹으면 이렇게 낯짝도 두꺼워지는 효과가 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선배는 차가 막히기 전에 내려가 봐야겠다며 슬슬 마무리했다. 한 삼십 분 정도 같이 있었나.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 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산뜻하게 갈 길을 떠나는 선배에게 너무 고마웠다. 선배는 한방이 있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선비 같으면서도 의외의 박진감을 갖춘 선배가 꽤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마음 쓰였다.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됐다.


수 시간 후 선배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안심이다.

그리고 늘어지게 늦은 아침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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