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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도 Sep 06. 2022

냉장고의 요정, 선배

선배의 마트 플렉스

"너 보니까 냉장고도 부실하더라."


선배는 어느새 내 냉장고 사정까지 파악해놨나 보다.


"그냥 일반 마트 말고 묶음단위로 파는 커다란 가족단위 마트 말이야. 그런 데서 한번 장 봐 놓으면  의외로 비싸지도 않고 오래 먹어."


"그래요?  너무 많지 않을까요?  어차피 혼자 있는데."


"아니야.  너 집에서 밥 먹으니까 금방 먹어. 특히 거기서 파는 피자가 있는데, 굉장히 커. 그런 거 두세 판 사서 얼려 놓으면 든든하다.  간편하고.  내일 같이 가보자."


집에서 차 타고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생각보다 멀어서 왜 거기까지 가서 장을 보나 싶었지만 거기서 파는 피자가 궁금해서 군말 않고 따라갔다.


마트에 다른 쇼핑몰 같은 것도 붙어있는 구조였는데    마트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꽤 많아 입구에 병목현상이 일어날 정도였다. 겨우겨우 들어가니 일반 마트와는 좀 다른 진열 방식이 신기해서 적응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서 필요한 거 다 골라봐. 사줄게"


"네?  정말요?"


화장품 샵에서의 일이 마트 버전으로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처럼 얼굴이 다시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정말 필요한 거 다 사도 돼요?"


"그래.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니까."


사실 마트야말로 필요한 게 정말 많은 곳이지. 확장된 동공으로 그곳을 둘러보는 내 표정은 분명 들떠있었다.

상기된 얼굴과 마음으로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리고 너무 신난 것이 들키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하며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선배... 이거 사도 돼요?"


집에서 쓰는 브리타 정수기 필터 3개 묶음을 들고 물었다.


"응. 사."


"음 이것도 정말 궁금한데, 타트체리액이라니. 많이 달지 않대요.  무슨 맛일까.  이것도 사도 돼요?


"응. 넣어."


몇 번을 물어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선배의 모습에 난 안심하고 필요한 것들과 먹고 싶은 것들을 담았다. 이것도 먹고 싶었고, 저것도 필요했고 하면서 담아가다 보니 생각보다 이것저것 많았다. 갈 때엔 내가 살만한 게 있으려나 하면서 갔지만 막상 이렇게 카트를 채우게 됐다. 당시에 한창 빠져있던 각종 스프랑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견과류인 피스타치오 무염을 살 때는 유독 신났다.


“이런 것 사봐. 이런 건 안 필요해?”


옆에서 쇼핑 도우미처럼 이것저것 좋은 것을 추천해 줘서 갈수록 대놓고 담아버렸다. 평소엔 가성비를 생각하며 치열히 머릴 굴리며 테트리스처럼 샀던 식자재들을 별 고민 없이 담는 기분이 꽤, 아니 많이 즐거웠다.


좋아하는 과일, 고기, 그 밖에 등등을 야무지게 담아 계산대에 줄을 서는데 여기에서 선배와 나와의 성격차가 느껴졌다. 난 선배와 나를 각각 다른 줄에 세워서 더 빠른 줄에서 계산하려고 하는데 선배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가 옮겨간 줄로 따라왔다. 설명을 해도 잘 이해를 못 해서 놀랬다. 이건 완전한 성격차이. 선배는 은근 느긋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조금 더 빠르게 계산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나와는 다른.


처음엔 그게 답답하게 느껴지다가 나중엔 나도 느긋해졌다. '그래 좀 늦으면 어떠나' 하면서. 

그러다 마지막으로 피자를 사러 갔는데 카트는 가게 안 입장 불가였다. 주문한 후 선배가 화장실에 갔고 그동안 나는 기다리는 줄을 서면서 가게 밖에 세워놓은 카드의 물건도 봐야 했다. 별일 없을 테고 역시 별일 없었지만, 기다리는 동안 물건이 없어질까 불안해하는 마음까지 느긋해 지지는 못했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서 더 신경이 곤두섰던 것 같다. 난 사람이 많은 곳에선 내 밥그릇 챙겨 먹기가 더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고 그래서 날카로워 지곤 한다.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내 순서는 저 뒤로 가버릴 것 같은 기분. 반면에 선배는 항시 느긋하고 여유 있어 보여서 그게 좀 부럽기도 하고.

선배 덩치가 커서 그런 점도 있을까. 그런 풍채의 사람들은 항상 좀 여유 있어 보이던데.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큰 박스 하나 넘게 물건을 잔뜩 싣고 와서 집에 정리하는 데에도 한참이었다.

그날 저녁 메뉴는 마트에서 사 온 가리비 찜. 달고 고소하고 짭짤한 가리비를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듣기론 남자 친구가 냉장고를 채워 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이런 경우가 정말 처음이었고, 이렇게 끼니까지 챙겨주는 남자가 있다니 싶었다.


마음이 편안한 날들이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려 주고, 마음껏 응석 부릴 수 있고,  뭔가 고장 나면 고쳐달라 할 수 있는 사람, 컴퓨터가 잘 안 되면 물어보고, 돌봄을 받는 기분. 혼자가 아닌 날들이었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 든든한 이가 내 곁에 있다.


당시의 나는 사랑받는 이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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