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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도 Oct 07. 2022

선배의 더티 톡

은근 야한? 아니 대놓고 야한!

분명 좋은 날들이었다. 선배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곤 했다. 내가 걱정할 것은 줄고 함께 의논할 사람이 곁에 있었다. 가끔 이런 식이라면 꽤 괜찮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좋은 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작은 가시들이 우리 사이에 작은 틈을 내고, 그 틈이 조금씩 커나가는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때도 그즈음이었다.      


날 거슬리게 하는 작은 가시, 처음엔 거스러미 정도로 여겼던 그것은 선배와의 대화. 

어느 날부턴가 대화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우리의 대화의 거의 80퍼센트가 야한 이야기로 점철돼 있었다. 

처음엔 나도 그러려니 하고 장단을 맞췄지만 1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야한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속편이 계속 개봉하듯 2탄, 3탄, 4탄, 5탄, 끊임없이 지속됐다. 한 번이면 족할 줄 알았던 더티 톡. 그것은 정말 더럽게 지겹게 지속됐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야한 이야기만 계속할 수 있는 건지. 내가 부러 주제를 180도 꺾어봐도, 선배는 다시 반 바퀴 돌아 원점으로 안착했다. 어느 날은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 됐는데, 그런데도 선배의 기분을 망치기 싫어, 관두자는 말을 못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던 우리의 시작점에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기까지 걸린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됐다. 물론 연인 사이에 이런 불꽃이 튀기 시작하면 한동안 빠져 지낼 수는 있으나 그 정도가 어느 정도여야지.      

마치 야한 이야기를 하며 느끼는 아랫도리가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하루의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현실 이야기, 당장 직장에 산적한 처리할 일들, 그것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할 것처럼, 선배는 야한 이야기에 매달렸다.

지금도 다시 그때를 떠올리면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다.  

   

그때쯤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선배의 야근도 잦아졌고, 업무 강도가 매우 세졌으며, 그 때문에 연락을 전처럼 자주 못 하기도 했다. 그의 일터는 전화도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아직 건설이 완성되지 않은 공장이었고 그곳에 설비를 마련하는 일이 잘 맞지 않아 이미 예산을 초과해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많았겠지. 난 진작에 도망갔을지 모를 그런 상황을 선배는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의 연속이 나날에서 귀하게 얻어진 통화 시간을 온통 야한 얘기만 해야 하는 기분은 처참했다. 농담처럼 야한 얘기 좀 그만하라고 면박을 줘도 그때뿐이었다. 같이 있으면 좋은데, 선배는 내게 안정감을 주는데, 이깟 야한 얘기가 대수랴, 하고 넘겨도 마음속에 어느 순간 찾아온 외로움은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너는 어디가 기분 좋아?”     


난 이런 질문은 한 번 했을 때 잘 기억하고, 두 번 묻지 않고 그저 실행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그런 유의 질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선배는 끝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이 질문을 반복해 던졌다. 다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난 다시 대답을 뱉어내야만 하는 처지로 돌아왔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잊어버렸을 가능성을 뺀다면 역시나 나머지 가능성은 이 질문을 그냥 던지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붕 뜨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잠자리를 처음 해본 십 대 소년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이 문제에 집착하진 않을 것이다. 야한 얘기를 못 하고 죽어, 한 맺힌 귀신이 진정 존재한다면 선배에게 빙의된 것이 분명했다.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양꼬치를 곧잘 사주곤 했다. 그날도 함께 양꼬치를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정도 집에 가까워졌을 시점이었다.  

   

“큰일 났다! 나 배 아파. 나 먼저 좀 갈게 너희 집 어느 골목으로 가는 거였더라?”      


선배는 물어보며 뛰기 시작했다.   

  

“이 골목인가!?”     


“아니요! 아니에요. 긴가민가 한 길은 확실히 아닌 거예요!”   

  

선배는 한 블록을 더 가자 그제야 길을 알아보고 황급히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내가 외친 말에 스스로 놀라 잠시 멈춰 그걸 곱씹고 있었다.  

   

‘긴가민가 헷갈리는 건, 확실히 아닌 것….’  

   

난 선배가 진짜 나와 함께하게 될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멍해진 채로 천천히 걸어 집에 들어와 바라본 선배의 눈은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워, 더욱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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