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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Sep 08. 2021

02. 둘이서 전원주택을 꿈꾸다

신혼은 층간 소음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7년이라면 길면 긴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남편 나이 27살, 내 나이 29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이었다.


 방 두 칸짜리 깨끗한 오피스텔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작은 오피스텔을 예쁘게 꾸미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들은 직접 도배도 하고, DIY 가구와 각종 소품으로 거실을 꾸몄다. 인테리어의 완성은 역시 카펫였다. 마지막으로 대형 샤기 카펫을 깔자 신혼집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행복했다.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집을 꾸미고, 결혼하기 전에는 나이가 드시고 부쩍 아침잠이 없어지신 부모님들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주말에도 강제로 잠을 깨야했던 내가, 둘 다 회사를 나가지 않는 주말에는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도 되었다. 그렇다. 결혼은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자유로워 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에겐 최상의 선택이자, 결정이었다.


 우리는 종종 작은 소품들을 사다가 집 안을 장식했고, 길가다가 사온 5천 원짜리 허브 화분으로 창가를 장식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천히 2세 계획을 하자던 우리에게 결혼 2달 만에 예기치 않게 아이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휴가 차 다녀온 제주도에서 수영하고, 등산하고, 승마까지 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오 마이 갓! 거기에서 안전하게 있긴 한 거니?) 아이의 존재를 안 순간, 가슴이 콩닥댔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엄마라니!


 9개월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남편을 닮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태어났다. 유산기, 조산기, 하혈에 입원까지 온갖 난리를 겪은 후에 태어난 아이였다. 소중했다. 하지만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좌골신경통까지 와 한 달간 다리를 내딛으면 온몸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거려 절룩거리면서 걸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2시간마다 깨는 아이 때문에 눈에는 날로 다크서클이 짙어갔다. 한참 아이는 모유를 먹고 자라야 한다는 설이 유행처럼 번질 때라 모유를 먹이고 싶어 젖양을 늘리기 위해 먹고 싶지 않은 미역국을 억지로 먹으며 하루 종일 젖을 아이에게 먹이고 유축하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타고나길 입이 짧고 살이 찌지 않는 빼빼 마른 체질 탓이 내 가슴에는 젖이 차오를 공간조차 없었다. 급기야 유축을 하다가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혼자 서럽게 울고 말았다.



1년 휴직을 하고 아이를 혼자 돌봤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고 치는 게 걱정이 돼 이유식을 할 때면 포대기로 업고 부엌에서 일을 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등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거울에 비추어 보니, 내가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기 위해 돌아선 순간 팔을 뻗어 수세미를 재빨리 낚아채 입에서 쪽쪽 빨고 있었다. 좌절스러웠다. 아이는 업고 있어도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침 전세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를 위한 좀 더 큰 집이 필요했다. 우리가 사는 오피스텔은 주상복합으로 5층부터는 아파트였다. 우리는 고심 끝에 우리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바로 위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했다. 39평, 1억의 빚을 내야 했다. 여러모로 우리에겐 버거운 평수와 돈이었기 때문에, 계약을 하고 온 다음날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사 온 바로 다음날, 이러한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예전 좁은 거실에서 돌아다니던 아이가 큰 집에 오자, 안방에서부터 거실 끝까지 빨빨거리며 너무 신이 나서 방실방실 웃으며 기어 다니는 모습에 큰 집으로 이사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잠시, 1-2년 후, 아이가 걷고 뛰어다니기 시작하니,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날에는 인터폰이 울렸다. 아랫집이었다. 새로 사준 붕붕카도 타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붕붕카를 타다가, 신이나 요란스럽게 타면 아이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야 했다.


아이가 뛰는 것이, 노는 것이,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일인 것이 슬펐다. 어렸을 적 꿈이 다시 떠올랐다. 전. 원. 주. 택.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완전한 '전원' 주택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주위에 숲이 있고 단독으로 지어진 집이 필요했다. 단독 주택에 살 수 있는 형편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와 남편은 타운하우스 전세까지 찾아가며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서울 최초의 타운하우스라는 36평짜리 전세는 어린아이가 살기에 계단이 너무 좁고 많았다. 36평이 3층으로 나뉘다 보니 한 층에 12평, 방을 빼면 거실은 좁디좁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저분한 마당을 정비하면 꽃과 나무를 키우고, 간이 수영장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쏙 드는 옛날식 난로가 있는 그림 같은 60평짜리 집은 가격이 비쌌다. 머리를 굴려 친정집과 합쳐 매매를 할까 생각해 다시 한번 함께 집을 보러 갔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 잔소리 듣지 않고 아침에 내 마음대로 일어나고, 내 마음대로 잠을 자고, 몸에 안 좋은 것도 가끔 내가 먹고 싶은대로 먹고, 내 마음대로 집을 꾸미고 싶어서였다. 맞벌이 특성상 부모님이 아이를 봐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번 합치면 다시 분가하기 힘들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하다. 한번 합치면, 매일 애들 밥이나 해주고, 손주들 돌보느라 늙는다는데.... 부모님 주위에서도 만류가 이어졌다.  이렇게 첫 번째 우리의 전원주택 계획은 무너졌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나는 틈만 나면 전원주택에 대해 알아보고, 관련 잡지와 기사를 살펴봤다. 내가 집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고 회사에 다니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버는 이유가 머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내 꿈 때문에....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터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꿈'이었다. 전원주택에 살 수 있는 돈이 우리에겐 없었다. 또한 전원주택 부지라고 하면 대게는 경기도나 지방이었다. 하지만 둘 다 서울 중심으로 출퇴근하는 우리로써는 이 또한 불가능했다.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정년퇴직이나 하고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협소 주택을 알아보았다. 서울의 단독주택 단지 등에 부지를 매입해 협소 주택을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협소 주택은 내가 꿈꾸던 너른 잔디 마당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새로 지은 협소 주택을 빼고는 주위는 온통 오래된 단독주택이다 보니 주위 환경이 아름답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꿈꾸는 '전원' 주택의 생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는 세 살 터울의 둘째까지 낳았다. 아들이었다. 딸을 원했지만, 딸 같은 아들이었다. 동성끼리 같이 크는 것이 좋다더니, 둘째가 돌이 지나자 둘은 둘도 없는 친구처럼 잘 놀기 시작했다. 둘이 역할극을 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면서 온종일 방과 거실을 누비고 다녔다. 문제는 층간 소음이었다. 잠시 내가 집안일을 하느라 주의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뛰기 시작했다. 매트를 깔았지만, 모든 집안에 다 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차!' 문을 열자마자 설레발을 떨었다. '어머!! 우리 애들이 뛰어서 시끄러우셨죠? 제가 딴일 하다가 깜박했어요!! 어머!!! 어떻게 해!! 죄송해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엄청 큰소리로) '엄마가 뛰면 안 된댔지??!!!!' 외간 남자 팔까지 부여잡고 먼저 설레발치는 통에, 아랫집에 사는 신혼의 젊은 남자는 30대 중반의 주책맞은 아줌마의 순발력에, 그 날도 한마디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이 커가자 움직임은 더욱더 커져갔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는 항상 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각종 어린이 체험과 박물관, 놀이공원, 키즈카페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아이들을 위해 체험전을 찾아다녔다. 나의 친구들은 주말에 갈 곳이 없으면 안 가본 곳이 없는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이렇게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는 집안 대청소를 하고, 월요일에는 회사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두세 번은 야근을 했다. 몸이 축이 나기 시작했다. 한번 걸린 감기는 3개월을 가더니 급기야는 폐렴이 되었다. 금융 쪽에 있는 남편은 매일 술자리 아니면 야근이었고, 나의 퇴근이 조금 늦어진 날에는 퇴근 후, 시터 이모님 퇴근 시간에 늦을까 봐 때로는 버스에서 내려 전력 질주를 하며 집에 돌아왔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허기진 배를 뒤로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첫째에게 유일하게 평일에 직장인 엄마와 할 수 있는 시간인 '책 읽어 주기'를 했다. 그나마도 둘째의 칭얼거림 때문에 이 달콤한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둘째는 나의 품에 아기띠로 안긴 채, 첫째는 그렇게 서있는 엄마의 발을 엄마 체온이라도 느끼자며 만지작 거리며 거실 바닥에서 떼를 쓰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재우고 그제야 씻고 잠이 들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아침이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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