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머릿속에 벚꽃 생각뿐이었다. 어떤 색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벚꽃의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몰라 난감했다. 규슈드로잉 여행 첫날, 다케오 시립 도서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3월의 끝날, 벚꽃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흐린 오후여서 화사한 느낌은 아니었다. 어떤 각도에서 그릴까 하다가 벚나무 앞 잔디에서 뛰어다니는 여자 아이가 눈에 띄었다. 곁에는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건물의 일부와 멀리보이는 산, 벚꽃과 인물 등을 넣어 그리면 될 거 같았다. 물감 통을 열고 벚꽃 색을 무슨 색으로 할지 망설였다. 후쿠오카에 도착하자마자 갔던 야마모토 문방당에서 샀던 브릴리언 핑크를 꺼냈다. 예전에 벚꽃그리기를 배웠을 때 조색 방법은 가물가물했다. 주어진 시간은 채 한 시간도 안됐다. 도서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서 스케치와 채색까지 하려니 마음은 급했고 벚꽃 그림은 밋밋했다.
우레시노 올레 길을 걷기 위해 도착한 요시다 사라야 도자기 마을 곳곳에 벚꽃이 화사했다. 잠시 들른 도자기 매장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찻주전자와 컵, 밥공기와 수저받침 등을 보다가 벚꽃 무늬 커피 잔 세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무수한 디자인과 색상의 제품 들 중에서 유독 분홍빛 꽃에 이끌렸다. 커피 잔은 벚나무 가지에 연분홍과 진분홍 자잘한 벚꽃들 무늬가 조화를 이루었다. 받침도 벚꽃 형태였고 컵과 같은 문양으로 세트를 이루었다. 나는 평소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활용도를 생각하면 찻잔을 사는 게 맞을지 몰랐지만 벚꽃무늬 커피 잔을 안사면 아쉬울 것 같았다. 올레 길 입구에서 벚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다이조지 절을 만났다. 한편에는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닌 108개의 작은 돌부처들이 아기를 안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지장보살 부처들은 가난과 전쟁으로 무덤도 없이 죽은 아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봄바람에 흩날리듯 사라진 여린 영혼들을 위로하듯 쉼 없이 돌았다. 다이조지 절 위에는 마을의 특성에 맞는 듯한 도자기 신을 모신 요시우라 신사도 있었다. 이어지는 올레 길은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올라 삼나무 길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오카와치야마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의 다리는 도자기로 장식되었다. 푸른 용문양이 펼쳐진 난간위에 붉은 꽃무늬의 커다란 도자기 병도 올려져 있었다. 마을의 지도도 도자기 재질로 구웠다. 사가현 이마리시에 위치한 마을 곳곳에 상점과 공방이 있었다. 걷다가 골목 초입에서 앞을 바라봤다. 멀리 우뚝 솟은 산이 보였고 길 따라 크고 작은 기와집들이 이어져있었다.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화사한 벚꽃나무가 발길을 멈추개 했다. 주어진 1시간 반 동안 풍경을 그려내야 했다. 골목 귀퉁이에 신문지를 깔고 물이 담긴 작은 통과 스케치북을 올려놓았다. 그림을 안 그려도 상관없었다. 가이드는 그저 돌아다니거나 쇼핑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매장에 들려 그릇 구경을 하더라고 어디선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여행 드로잉이 목적인 여행이고 모두 그림에 진심이었다.
그 지역은 나베시마 가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에게 도자기를 굽게 한 곳이다. 도공들은 깊은 골짜기에 갇혀진 채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받으며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워해야했다. 그들은 대우도 잘 받았고 가정을 꾸려가며 도자기를 만들었다지만 타국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강요받은 삶을 살아냈다. 마을 초입에 서있는 공동 비석들은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골목에서 멀리 보이는 막다른 곳에 높이 솟은 산 봉우리가 엣 도공들이 도자기를 굽다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을 산일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했다. 전 날과 달리 날은 화창하게 개었고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화사한 벚꽃은 환하게 빛났다. 이파리가 하나도 안보이고 꽃은 만개한 완벽한 절정의 꽃송이들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산과 푸른 나무와 빛나는 벚꽃과 크고 작은 기와집들을 스케치북에 담아내야했다. 가끔 관광객들이 지나가며 사진을 찍기도 했고 소형 자동차들이 골목길을 지나가기도 했다. 구석에 서서 그 순간의 공기의 느낌까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다가와서 내게 계속 서서 그린다고 말했다. 줄곧 서서 그린 줄도 몰랐다. 앉으면 보는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1시간 반 동안 서있으면서도 다리 아프다는 의식을 못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했다 싶어서 도구를 챙겼다. 시간이 더 있으면 더 좋은 결과물을 남길 것 같아도 여행드로잉은 정해진 시간 안에 표현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정해져있다. 아쉬움이 남아도조건이 적당할 때 손을 떼어야했다.
시볼트 온천탕은 19세기 초 일본에서 활동했던 독일의사의 이름을 사용한 유럽식 고딕건물이다. 연한 노란색 벽에 빨간 지붕 위로 첨탑까지 있는 건물 외관은 그려봄직했다. 오후여서 건물은 그늘졌고 주변의 벚꽃도 밝아 보이지 않았다. 강변의 양조장과 술집 등의 건물과 반영, 하늘을 배경으로 뻗은 벚꽃의 가지를 스케치만 하고 채색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그리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리는 과정을 봤다. 선생님은 벚꽃을 화사하게 그리지 않았다. 저녁의 느낌 그대로를 담아냈다. 벚꽃은 분홍색이 아니고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하늘도 채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인을 한 그림은 완성도가 있었다. 주어진 시간에 특징을 잡아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없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그늘진 건물과 벚꽃은 억지가 아닌 현장의 느낌 그대로를 표현했다.
3박4일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비가 왔다, 후쿠오카 공항으로 가기 전에 들린 다자이후 텐만구에는 비가 와도 사람들이 많았다. 드로잉 여행이니 어딘가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인근의 상점가를 둘러보고 커피 집에 들려 실내를 그려도 좋겠다 싶었다. 일행 몇 명과 함께 전통 가옥을 찻집으로 개량한 곳으로 갔다. 일본식 정원은 석등과 물이 담긴 돌절구와 화분들로 아기자기 하게 꾸며졌다. 한편에는 대나무들이 무리지어 곧게 뻗어 있고 곳곳에 하얀 티 테이블이 놓였다. 촉촉하게 젖은 정원은 생기로 가득했다. 연분홍 꽃으로 활짝 핀 벚나무에는 연녹색 잎들이 나기 시작했다.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노오란 불빛이 따스한 실내 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 일행은 이층 건물과 동 떨어진 별채로 들어갔다. 실내도 갖가지 생화로 장식되었다. 테이블 마다 컨셉이 조금씩 달랐다. 테이블위의 하얀 도자기 그릇에 벚꽃이 가지에 달린 채로 담겨졌다. 나는 비오는 여행의 마지막 날,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한번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머지 일행 들도 따뜻한 커피와 이이스 커피, 녹차, 아이스크림 등을 시켰다. 작은 소반에 차와 구운 찹쌀떡과 함께 생화가 장식이 되어 나왔다. 내 앞의 소반 위에는 빨간 동백꽃과 보라색 꽃이 놓여있었다. 카페는 계절 마다 다른 꽃으로 소반을 장식된다고 한다.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스케치치 북을 꺼냈다. 각자의 소반에 담긴 찻잔과 꽃을 그렸다.
서울에도 벚꽃이 한창이었다. SNS에 규슈여행 기록을 부지런히 담았다. 벚꽃의 변화 상황은 빠르니까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서둘러야했다. 일본의 벚꽃들은 눈처럼 흩날리고 초록 이파리가 나면서 변해가겠지만 기억 속에는 완벽하게 빛나던 벚꽃나무의 모습들이 아른거렸다. 도자기 마을에서 사온 벚꽃 무늬 잔에 녹차를 마시다가 아주 가끔은 커피를 마실 것이다. 커피 잔의 벚꽃 그림을 따라 그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