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마르트 언덕과 여행에 대한 환상
파리 왕복 비행기를 예약하고 25일간 남프랑스 이태리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여행을 파리에서 시작하고 마쳤지만 실제 파리를 관광한 것은 하루 반 정도니 다른 도시보다는 짧았다.
떠나기 전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몽마르트 언덕으로 갔다. 파리의 지하철 노선도 복잡하고 분위기도 편하지 못해서 다니기가 긴장됐다. 낭만적으로 상상되던 몽마르트언덕도 사람이 워낙 많으니 편하지가 않았다.
혜진 아빠 엄마와 따로 다녔지만 저녁에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한 흑인이 다가오더니 핸드폰을 낚아채더란다. 자기 사진을 찍었다며 실갱이를 걸어왔다고 했다. 낭패를 모면하기는 했다는데 파리는 도처에 긴장할 요소가 많았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 했다고도 했다.
그런 대화가 떠올라서인지 비도 오는데다가 피곤하기도 해서 성당만 겉에서 보고 올라갔던 길로 다시 내려왔다. 딸이 부탁했던 달팡 크림을 사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유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기 전 들렸던 몽쥬 약국이 문을 닫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지치기도 해서 맥도날드에 잠시 들려서 햄버거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사실 여행을 하는데 마음가짐이 중요한지도 몰랐다. 여유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은 불상사에 대한 걱정과 가능하면 사다달라던 물건 구입 때문에 몽마르트 언덕을 찬찬히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쉽게 여겨졌다. 또 언제 올지도 모를 곳인데 많은 영화와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몽마르트 언덕의 여유와 낭만을 제대로 못 느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어떤 바램과 기대는 현실과 다를 수도 있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원시성을 느끼려했지만 막상 기대와 달라 그림은 자신의 상상이 더해졌다고 한다.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파리에 대한 환상도 현실은 그리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비뇽, 엑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에즈, 니스 등 남프랑스에서는 분위기가 평화로웠다. 대도시로 올수록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이태리에서도 그랬다. 라스페치아나 친퀘테레, 베로나는 평화로웠고 피렌체에 가니 좀 복잡했으며 밀라노에서는 더 심했다. 그래도 다양한 분위기의 남프랑스와 이태리의 도시들을 여유롭게 3박 정도씩 하면서 경험할 수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2. 여행을 마치며
두 부부가 따로 다니기도 하고 함께 다니기도 하며 조화롭게 잘 보냈다. 자유여행의 여유를 가르쳐준 남편친구 부부에게 감사했다. 일정을 잡고 예약하고 현지에서 소통해야하며 변수에 대처해야하는 것 등으로 자유여행을 시도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여러 각도로 생각하게 한 장기여행이었다.
혜진 아빠는 세계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우리 부부도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전부터 가보 싶었던 독일을 자유여행 해보고 싶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파리 드골공항의 빵집 'PAUL'에서 크로아상을 마지막으로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녹지가 보이다 푸른 하늘이 보이며 장거리 비행이 시작됐다.
가끔 창밬을 보면 까만 밤하늘에 북두칠성이 보였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북두칠성이 떠올랐다. 이번 긴 여행을 통해 내 생홯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3. 여행, 그 후-
4월 초 아파트 뒷산에 벚꽃이 한창이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상태여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야외지만 되도록 서로 멀리 걸으려했고 마스크를 안 한 상태라면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주말안양천변 벚꽃 길 진입로는 바리게이트로 막혀 있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통제요원들이 못 들어가게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멀리서 꽃을 바라보거나 통제구역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여의도 벚꽃축제도 취소되었다.
예전 생활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경험과 더불어 다른 관점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공기관에서 강의를 듣거나 영화관에서 관람 등이 어려워지면서 집에서 책을 보거나 그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였는지. 소식이 뜸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먼저 안부 전화를 하기도 했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만나서 대화하는 일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하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행은 어려웠다. 감염자 발생 뉴스를 계속 듣는 상황에서 누군가와의 만남이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니 소통의 대상이 그리웠다. 영화‘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고립된 톰 행크스는 럭비공에게 ‘윌스’라는 이름을 만들어주고 대화를 한다. 그 심정처럼 산책길에서 사람이 아니더라도 친근한 대상을 찾고 싶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처럼 끌리는 나무여도 좋을 것 같았다. 산책길에서 자주 보던 편편한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에 가끔 앉아서 바위에게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심정도 생겼다.
가는 봄이 아쉬워서 친구 몇 명과 서대문 안산에 벚꽃을 보러가려고 약속을 잡았다. 한 친구가 취소했고 나머지 친구들도 미루자 해서 약속은 무산되었다.
SNS로 소통하는데 실제 만나지는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외국과 영상통화까지 가능할 만큼 과학이 발달했는데 쿄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에는 속수무책인 현실이었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발생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감염자의 침이 호흡기나 눈, 코, 입의 점막으로 침투될 때 전염되는 병이다. 2~14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고열(37.5도 이상), 기침, 호흡곤란 등 호흡기 증상이나 폐렴 증상이 나타나며 심해지면 사망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1월 20일에 첫 확진자가, 2월 20일에 첫 사망자가 나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었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해야했다. 3월 초에는 확진자가 5천여 명, 사망자가 30여 명이었다. 학교도 개학을 못했고 재택 근무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 사용과 온라인 주문이 늘어났다.
2020년 4월초에 우리나라는 확진자 1만명에, 사망자가 170명 정도였다. 이탈리아는 확산 속도가 빨라서 확진자 11만 명에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었다.
부활절인 4월 12일, 밀라노 두오모 성당 언에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2세)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에마누엘레 비아넬리와 단둘이 섰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취지로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 공연이 열렸다. 청중은 하나도 없었고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되었다. 25분 공연의 마지막 곡은 ‘어메이징 그레이스였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그 곡을 부르기 위해 성당 밖으로 나왔다. 12세에 시력을 잃은 그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걸어서 두오모 광장을 향해서 섰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에는 관광객으로 항상 붐비었을 광장 앞에 홀로 선 안드레아 보첼리는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카메라는 상공에서 그가 하나의 점처럼 보일 때까지 비추며 텅 빈 광장을 보여주었다. 세계 주요도시를 하늘에서 찍은 영상들도 보였다. 파리의 에펠탑주변도, 미국의 타임스퀘어 광장도 오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역사 이래 이런 시간이 있었나 싶었다.
작년 가을에 갔었던 밀라노 두오모 광장이 생각났다. 세계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풍경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나 싶게 놀라웠다.
9월말에 시작했던 25일 간의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
아름다운 풍경 뿐 아니라 그 안에 스며있던 예술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더욱 빛나는 여정이었다.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비교적 여유 있는 자유여행이었지만 그냥 보고 스쳤던 부분도 많았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두 딸이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를 5월말에 함께 가자고 했다.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했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싶었다. 아쉬웠던 부분을 채우고 어느 부분에서는 딸들에게 안내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계적으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상태가 더욱 심해졌다. 국가 간의 이동이 어려워졌다. 안드레아 보첼 리가 공연한 4월 12일 무렵에 밀라노 인근의 인구 11만 명의 소도시 베르가모는 확진자가 1만명 넘게 나왔다 군용 차량이 줄줄이 관을 옮기는 사진이 보도되어 ’죽음의 도시‘와 같았다. 이탈리아 전체를 봐서는 15만 명이 넘는 확진자에 2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5월 말에 가기로 한 이탈리아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비행기 표와 숙박권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순탄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여행자의 입국을 금지한 상태였지만 숙박비를 환불해주지는 않았고 나중에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제공한다는 식이었다. 언제 해외여행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페스트는 14세기 유럽인구의 30~40 %를 몰살시켰다. 남프랑스를 여행하며 페스트 창궐 시절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까마귀처럼 몸 전체를 감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시체를 옮기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당시의 비극은 과학과 의료 기술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는데 지금도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다. 대단하다 여겼던 문명의 발달이 무색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거칠 것 없었던 인류에게 호된 경고를 주었다. 환경을 생각 안 하는 소비와 에너지 소모에 의한 오염은 지구를 힘들게 했다. 엄청난 이동으로 비행기에 의한 공해도 컸다. 전염병으로 인해 호된 채찍을 맞으며 인류는 자숙하고 지구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한다.
알베르 카뮈( 1913~1960)는 1947년 발표된 ’페스트‘애서 말한다.
’전쟁과 감염 병에 늘 속수무책인 인간의 어리석음은 악착같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누구도 그 피해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해준다.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정리하며 연관된 역사와 문화와 사상에 대해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코로나19사태가 진정되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지는 미래의 언젠가,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여행에 나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