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인 아내로 산다는 것, 그 억울함의 기록
샵과 부대 사이에서
의정부에서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면서 나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살았다.
하나는 손님의 피부를 들여다보며 오롯이 내 일에 집중하는 세계. 또 하나는 남편의 계급장이 내 삶의 무게를 결정하는 세계.
아이의 학교도 의정부, 내 일터도 의정부였다. 남편이 근무하는 부대는 거기서 멀었다. 우리는 주말부부였다. 하지만 '주말부부'라는 단어가 주는 거리감이 나를 군인 가족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았다.
부대 회식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윗상사 가족이 이사를 가면 송별회를 열어야 했다. 부대 체육대회에는 음식을 준비해야 했고, 명절에는 남아있는 병사들 밥을 지어야 했다. 제일 높은 계급의 사모님이 모이라 하면 모여야 했고, 찬조금을 내라는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늘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이게 맞는 건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소령 진급을 앞두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 있었으니까.
"내조가 중요해요."
그 말은 늘 웃으며 건네졌지만, 나에게는 족쇄처럼 들렸다.
"3 중대장 가족 빼고"
그날도 샵이 바빴다.
마음은 이미 부대에 가 있었지만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님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달려갔을 때, 음식은 이미 차려져 있었고 장병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대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주신 가족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3 중대장 가족 빼고."
그 말이 공중에 떠오르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3 중대장 가족. 그게 나였다.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나는 이름도 없이 제외됐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울면 더 작아질 것 같아서.
나는 참석하지 못한 행사마다 찬조금을 냈다. 늦게 도착하면 미안한 마음에 두 배로 더 신경을 썼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내 존재는 감사 인사의 예외였다.
그날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집에 오는 길, 차 안에서 혼자 울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진급은 됐는데
남편은 1차 소령 진급에서 떨어졌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감정이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슬픔인지, 안도인지, 아니면 그냥 허탈함인지.
부대를 옮겼다. 새 부대의 분위기는 달랐다. 사모님도 직장을 다니는 주말부부셨고, 모임도 잦지 않았다. 내 상황을 이해해 주셨다. 억지로 참석하지 않아도 눈치를 주지 않으셨다. 처음으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편은 2차에서 소령 진급에 성공했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기다렸다. "당신이 고생했어." 그 한 마디를.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봐봐, 내조 없어도 진급할 수 있잖아."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조용히 박혔다.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채로.
내색조차 못 한 것들
남편은 윗사람에게 선물하거나 금일봉을 건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 몰래 했다. 소소한 과일 선물부터, 때로는 내 한 달 수입의 일부가 들어가는 것들까지. 누군가의 생일, 명절, 중요한 자리마다 슬며시 챙겼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정성이 남편의 이름 아래 조용히 쌓여갔다.
진급 발표가 났을 때, 나는 그 이름들을 떠올렸다. 내가 포장했던 선물들, 봉투에 담았던 마음들. 그리고 남편의 말을 다시 들었다.
내조 없어도 됐잖아.
억울했다. 서러웠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꺼낼 수가 없었다. 말하면 작아 보일 것 같았고, 증명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웃었다.
에필로그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3 중대장 가족 빼고.
그 말이 나를 지웠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 뒤에 서 있던 내가, 이제는 내 이름으로 강단에 선다. 내 브랜드로, 내 목소리로, 내가 쌓아온 23년을 근거로.
아직도 가끔 억울하다.
그리고 그 억울함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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