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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 학습 일대기 (2)

영어 독학자의 기쁨

오래 잊고 있던 기억이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자 마자 무의식의 심연에서 짠, 하고 나오는 건 제법 신묘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떠오른 기억인데, 정확히 언제인진 모르겠다. 그냥 나와 동생 모두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이지 않았을까 한다. 세 살 터울이던 동생과 종종 하던 놀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미국인'인 척하는 상황극이다. 나는 유치원을 따로 다니진 않았고, 대신 당시에 있던 속셈 학원의 유치부에서 딱 1년 정도 지냈는데 그때 배우던 일명 '알파벳 송'도 이런 노랫말로 끝맺음됐다. "이 모든 말은 미국 사람이 쓰는 말이 입니다(멜로디에 맞춰야 하므로 꼭 '말이 입니다'라고 길게 늘여 줘야 함)♪"


우리의 놀이는 이런 식이었다. "어쩌고저쩌고" 뭔가 영어 느낌을 내서 아무런 말을 한다. 그다음 내가 뭐라고 했는지 한국어로 설명을 보탠다. 그러면 상대도 "이러쿵저러쿵" 뭔가 영어 느낌으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 내가 한 건 이런 말이었어, 하고 설명을 보탠다. 이렇다 보니 랠리가 전혀 오갈 수 없는 서브만이 난무한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동생이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 먼저 '진짜' 영어를 배우게 된다. 그때 아마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때만 해도 3학년 때부터 정규 과정에 영어가 포함됐으니까. 정확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생이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어책을 가져다가 혼자 영어 공책에(이건 어디서 났는지 잘 모르겠다) 알파벳을 따라 쓰며 영어 알파벳을 익혔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 지금 알파벳 완전 틀리게 쓰고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한 기억만은 제법 뚜렷하다. 영어 공책의 네 줄에 알파벳을 어떻게 걸쳐 써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서 헤매면서도 그냥 혼자 그렇게 공책 펴고 끄적이면서 노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 생활하면서 '영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얼른 배우고 싶어서 기다렸던 과목이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되어 드디어 영어를 배우게 된 내가 영어 천재의 정도를 걷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대로글을 마칠 수 있으니 나도 좀 덜 수고롭겠지만, 여기에서 내가 이십 대 후반에야 영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운명의 만남(?)이 한차례 등장한다. 당시에는 영어 숙제를 해 가려면 영어 테이프를 들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그거로 영어 테이프만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뜬금 없이 라디오 방송에 푹 빠져서, 유일하게 가사를 다 외워 완곡할 수 있던 곡이 〈과수원길〉이었던 한 초등학생은 대중가요에 빠져서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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