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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 학습 일대기 (6)

영어 독학자의 기쁨

아직도 감기가 안 나았다. 나의 고뿔 역시 못지않은 중병임이 분명하다. 어젯밤에는 정신을 못 차리게 아프더니 오늘은 또 제법 살 만해졌다. 하루에 코 푼 횟수가 열 번 안쪽으로 줄고 목 통증이 거의 사라져서 감사한 하루다.


지난번에 '영어'를 내 삶에 들여오는 일을 얘기하다 만 것 같다. 영국으로 워홀을 떠나기 전까지 내 주변의 인맥은 주로 이런 구성이었다. 오래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과생), 공대생, (다수가 공대 출신인) 개발자. 오래 만난 친구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대화의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땐 진짜 음악 얘기, 책 얘기, 영어 얘기 나눌 상대가 절실했는데 '되겠어?' 싶은 마음에 체념했던 것 같다. 사람 만나는 대신 라디오랑 팟캐스트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미리 스포일러를 날리자면, '된다.' '되겠어?'하는 마음을 그냥 '된다'로 바꾸기만 한다면. 그리고 이 '된다'의 시작이 내게는 워킹홀리데이였던 것 같다. 함께 일하던 친구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한 달에 30만 원씩 딱 1년 적금을 들던 때만 해도 '내가 진짜 워킹홀리데이를 갈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그로부터 출국까지 한 3년쯤 걸렸다. 나보다 몇 살 더 어리고 여러모로 여유가 있어 보였던 (이건 순전히 남이니까 납작하게 본 거겠지만 아무래도 워킹홀리데이 비자에 나이 제한이 있긴 하니까) 친구는 이후에도 딱히 워홀을 시도하진 않은 것 같다. 뭐, 이걸 누구든 꼭 해야 한다 이런 건 아니지만, 결국엔 뭐든 실행에 옮겨야 실행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가 워홀을 진짜 가겠구나' 싶은 시점부터는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당시에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데, 지금 보니 그렇다(좀 미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돈도 딱히 없었는데 엄마가 도와줬고(내 출국을 마지막까지 가장 반대하던 게 우리 엄마였는데 내 체류를 가장 전적으로 도운 것도 엄마라는 게 좀 신기하다. 빨리 부자돼서 워홀 때 받은 것부터 갚아야지…) 그렇게 출국해서 함께 살게 된 한국 유학생 동거인(영국식으로 말하자면 플랫메이트)과 동거견 두 마리가 내가 그 낯선 땅에서 발 붙이고 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재밌게도 친구가 음대 석사 유학을 온 학생이라서 집에 있는 건반으로 피아노 연습도 시켜 줬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 일을 내 생업으로 삼았는데, 일이 딱히 많이 들어오진 않아서 생계가 매우 곤란해지긴 했다. 그때 런던에서 밥 먹고 잠이나 자며 그럭저럭 큰일 없이 잘 지낸 건 순전히 주변 사람들 덕분이다. 그리고 워홀 시절을 기점으로 기존에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대다수 정리되었다.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 일을 하며 심지어 영어 쓰는 나라에서 체류 중이었지만 그때가 내게 열심히 언어로(영어로) 소통하며 지낸 기억으로 남지는 못 했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가장 조용히 보낸 시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으니까. 그러다가 인제 슬슬 빠끔빠끔 물 위로 올라와 입 좀 뗄까 싶게 살 만해질 즈음에 귀국했다.


영어 쓰는 나라에 있을 때가 내겐 어쩌면 영어와 가장 내외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으로 돌아오고부터는 제법 독기에 차 있었다. 영어 하는 나라에 꼭 있지 않아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비싼 비용을 들여 톡톡히 배웠으니까. 아, 내 경험은 이 명제(?)의 대우가 성립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못해도 영어 하는 나라에서 지내는 게 가능하다. 근데 이게 대우가 맞긴 한가?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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