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앨런 & 앨리엇 (2)

피아노 독학자의 기쁨

요즘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오히려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을 피하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지 나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수일 미뤘더니 그간 쌓인 가책으로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 피아노도 비슷하게 "막상 하면 진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으로 연습을 좀 건너뛰었다. 사실 이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냥 대충이라도 아무렇게나 하는 게 최선인 걸 아는데, 계속 "내일부터 해야지" 하면서 미루느라 그 내일이 잔뜩 묵직하게 쌓였다. 이거 쓰고 나면 자기 전에 전자건반이라도 좀 뚱땅거려 봐야지.


요즘 글쓰기, 피아노 연습, 그림 연습 전부 좀 어영부영 건너뛰고 있는 대신, 매일 1만 보 걷는 취미(?)에 기력을 쏟고 있다. 대충 2월 말부터 했으니까 며칠만 더 애쓰면 꼭 한 달을 채운다. 요즘은 그래서 어딘가 맘에 드는 길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건 물 위를 건너는 다리고(길수록 좋다), 또 지하철 역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해도 반갑다.


이렇게 쏘다닐 때 빠질 수 없는 게 뭔가 들을 것인데, 거의 99%쯤에 해당하는 시간은 이어폰을 쓰고 다녀서 그 순간에 어울리는 뭔가를 찾는 게 제법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매슈 사이드가 진행하는 BBC 팟캐스트 〈Sideways사이드웨이즈〉나 아니면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거나, 아니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끌리는 음악을 듣는다. 요즘은 맨날 최소 1시간 반쯤은 걸으니까 비슷한 걸 듣는 게 좀 지겨워져서 음악이 자주 바뀐다. 그리고 또 하나 특징이랄 것이 있다면, 예전에 즐겨 듣던 음악을 다시 듣는다. 15, 20년 전쯤에 좋아했던 음악을 오랜만에 들으면 그때의 기분이 문득 되살아나서 묘한 감상이 든다.


며칠 전에는 송도국제교를 건너면서 오랜만에 제이슨 므라즈의 〈Mr. A-Z미스터 에이투지〉 앨범을 들었다. 발매 당시에 제이슨 므라즈를 트는 카페가 정말 흔해서 내게도 므라즈의 음악은 왜인지 그때의 기억 저장소 같은 느낌이다(2020년대에도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그리고 이 앨범 타이틀이 자신의 이름 '므라즈'의 철자(Mraz)를 그대로 가져다 만든 말장난(?)인 걸 뒤늦게야 알았는데, 한참 뒷북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재밌다. 므라즈 외에도 내가 비슷한 시기에 기억을 담아둔 아티스트로 바우터 하멜이 있는데, 〈Nobody's Tune노보디스튠〉 같은 앨범은 봄에 살랑살랑 기분 내며 듣기에 제격이다. 므라즈는 미국 출신이고, 하멜은 네덜란드 출신이다(노래는 주로 영어로 하지만). 내가 원래 출신 문화권 못지않게 사람 나이를 잘 궁금해하기도 하고 잘 기억하는 편인데 둘이 딱 동년배다(갑자기?). 나는 주로 생년을 기억하는 편인데, 태어난 시기를 알면 대강 그 사람의 보편적인 경험을 어림잡을 수 있어서 좋다.


딴소리가 길었는데, 가끔 별 이유 없이 기분 좋게 음악을 들으면서 길을 걸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 음악 하겠다는 제법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삼 지금의 이 감정이 소중하고 고맙다.


전에는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온통 불만이었다.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서 결국 슬쩍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길을 갔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다시금 그때 가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용기가 안 나 겨우 기웃거리는 데 그친 길로 굽이굽이 돌아와 보니, 그냥 모든 게 감사하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어도 그 잡다한 경험과 고민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내가 된 거니까. 그리고 그 여정의 결과로 나는 이제야 겨우 하고 싶은 일을 내 방식대로 시도해 볼 용기를 가득 채웠다.


'이제 와서 뒤늦게'라고 불평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이 마음이 내게 와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뭐든 기꺼이 즐겁게 힘차게 해 보려고 한다. 언젠가 시간이 좀 더 흘러 지금 듣던 음악으로 추억을 되새겨 볼 때가 오면,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생생한 감각으로 이때를 추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도 무감해지지 말고 힘껏 생생하게 현재를 잘 살아내야겠지.


뭔가 오늘은 조금은 뜬금없게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20년 전쯤의 내게 고마워지는 하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