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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etween Words

말과 세계 사이, 하버마스의 대화

‘의사소통의 철학’으로 읽는 공론장의 미래

by Jwook

대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는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계의 거장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적 전통을 이어받아 ‘의사소통적 합리성’ ‘공론장’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스승 세대는 “이성은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며 비관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달랐다. 그는 대화와 토론 속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가 말한 합리성은 효율이나 계산이 아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능력이다. 우리가 말하고 듣고 성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합의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토대였다.


이상적인 대화란 무엇인가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완벽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누구나 상대의 주장을 검증하고 반박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셋째, 거짓 없이 진심으로 말해야 한다.

넷째,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오직 더 나은 논리만이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18세기 유럽의 살롱이나 커피하우스가 그 모델이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곳에서는 신분을 내려놓고 공동체의 미래를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근대 민주주의가 싹텄다. 하버마스는 이런 공간을 ‘공론장’이라 불렀다.

마담 조프랭의 살롱, 1814, 계몽시대 파리 지식인들의 토론을 그린 작품으로, 유럽 공론장의 상징이다. 아노세 르모니에 ⓒ Wikipedia

현실은 이론과 달랐다


그러나 현실의 공론장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대화해야 할 ‘생활세계’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침식당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를 ‘식민화’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회의실에서 “이 안건의 투자 대비 효과는?”이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대화는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익인가’로 바뀐다. 효율·속도·성과의 잣대가 들어오면서, 진정한 소통은 사라진다.


내가 목격한 공론장의 붕괴


몇 해 전, 나는 클럽하우스라는 음성 SNS에서 그 현실을 목격했다. 처음엔 신선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회 이슈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했다.


하지만 곧 분위기가 달라졌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반론은 논리가 아니라 편을 가르는 도구가 되었다. 하버마스 식으로 말하면, 대화는 ‘의사소통적 행위’에서 ‘전략적 행위’로 바뀐 셈이었다.


이해하려는 시도 대신, 상대를 이기려는 싸움이 되었다. 토론방 안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을 함께 찾는 동료가 아니었다. 그저 승패를 가르는 경쟁자였다.


더 큰 문제는 구조였다. 누군가의 발언은 ‘좋아요’ 수로 평가되고, 논쟁은 팔로워를 늘리는 수단이 되었다. 진정한 이해보다는 눈에 띄는 영향력이 중요해졌다. 생활세계는 이미 체계의 논리에 점령당한 것이다.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공론장


오늘날의 공론장은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우리는 이미 동의할 만한 의견을 먼저 보게 되고, 반대 의견은 잡음으로 치부된다. 하버마스가 꿈꾼 평등한 대화의 공간은

이제 ‘주목 경제’라는 새로운 위계 속에 갇혀 있다.


문제는 개인의 태도가 아니라 구조다. 우리는 민주적 대화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빠른 결론과 즉각적인 감정 해소를 선호한다. 인터넷 댓글창이든 회의실이든, 우리는 감정의 속도에 휩쓸리고 생각할 시간을 잃는다.


그럼에도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 모든 왜곡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왜일까? 완벽한 대화는 불가능하더라도, 대화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만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대화라도 계속하는 것,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그는 단순히 ‘예의 바르게 말하자’는 도덕적 당부를 넘어, 제도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화의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철학적 요청이었다.


서로의 말을 끝까지 존중하려는 시도 자체가 사회를 지탱한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히는 그 마찰 속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숨 쉰다. 공론장은 차이를 없애는 공간이 아니라, 차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공간이다.

기타와 벽난로 위의 정물, 1921, 서로 다른 형태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마치 대화하듯. 조르주 브라크 ⓒ The Met Museum

느린 리듬을 지켜내는 용기


결국 중요한 것은 논쟁의 승패가 아니라, 그 과정을 버텨내는 느린 리듬이다. 이 리듬은 상대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자주 포기하는 그 느린 경청의 시간—하버마스가 말한 의사소통의 윤리는 바로 그 느림을 견뎌내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러나 피로는 언제나 합리보다 빠르다. 소진되는 감정, 끝없는 반목 앞에서 그 느린 리듬을 지켜낼 여력 자체가 이 시대의 가장 귀한 자원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


오늘 당신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반박하기 전에, 상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가? 나와 다른 의견을 견디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노동이다.


하버마스의 이상은 여전히 멀다. 하지만 그 이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느린 용기—그것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일 것이다.


“의사소통은 단지 말의 교환이 아니라,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행위다.”

— 위르겐 하버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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