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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pace and Time

실마리를 찾는 기술

빛과 어둠이 나누는 건축의 대화

by Jwook


어느 봄날 오후, 나는 책상 앞에서 한 시간째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글이든, 설계든, 사랑이든. 그때 커피잔 옆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먼지 입자들이 공중에 떠올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 순간 알았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아주 느린 움직임이라는 것을.

실마리는 갑자기 번뜩이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계 속에 매 순간 스며 있는 징후다. 아침 햇살이 책상을 비스듬히 스치며 만드는 그림자의 각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리듬.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던 작은 현상들 속에서, 다음 문장의 단서가 발견된다. 실마리를 잡아챌 수 있는 사람만이 다음 선을, 다음 감정을 이어갈 용기를 얻는다.


빛의 침묵 — 루이스 칸


건축가 루이스 칸은 "빛은 건축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설계란 단순한 구조의 계획이 아니라, 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침묵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과정이었다. 칸은 설계 초기에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도서관은 무엇을 원하는가?" "대학은 무엇을 꿈꾸는가?"

루이스 칸 (Louis I. Kahn, 1901–1974)
“건축은 빛 아래에서 태어난 형태다.” 20세기 건축의 거장. 솔크 연구소와 킴벨 미술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통해 ‘빛과 침묵의 건축’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세웠다. 현대 건축이 잃어버린 ‘존재의 숭고함’을 되찾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르 코르뷔지에 이후 건축사에 가장 강렬히 새겨졌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칸에게 건축이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사물과 장소가 스스로 드러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었다. 캘리포니아 라호야의 솔크 생물학 연구소에서 그는 중앙 광장에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두 건물 사이로 단 하나의 수로만이 태평양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곳에 서면 빛과 물과 하늘만이 대화한다. 인간은 그 대화를 듣는 관객이 된다.

노을빛 속 설크 생물학연구소의 중앙 축은 침묵과 명상의 공간처럼 보인다. © Architectural Digest
자연과 건축의 조화를 통해 ‘사유의 풍경’을 만든다. .© “Site Visit: Louis Kahn’s Salk Institute”
콘크리트와 티크 목재가 만들어내는 절제된 아름다움 속에서, 빛은 회랑을 따라 흐르며 침묵과 사유의 리듬을 완성한다. © Getty Iris Blog
빛과 침묵이 만나는 공간. 중앙의 수로는 해를 향해 곧게 이어지며, 인간 사유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 letstalkallthingsdesign.wordpress.com

칸은 말했다. "침묵은 빛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의 건축에서 실마리는 '침묵 속의 응답'이었다. 묻고-듣고-응답하는 과정 속에서 공간은 형태를 얻고, 사유는 구조로 구체화된다. 건축은 세계와 나누는 긴 대화였고, 실마리는 그 대화가 시작되는 첫 호흡이었다.


부재의 메아리 — 다니엘 리베스킨트


루이스 칸이 '빛의 침묵'을 들었다면,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부재의 메아리'를 설계했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간으로 말하게 만든 건축이다.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beskind, 1946– )
“건축은 기억을 새기는 언어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해체주의 건축가. 그의 건축은 전쟁, 상처, 기억의 윤리를 기하학적 언어로 새긴다. 그라운드 제로 마스터플랜, 덴버 예술박물관 등 현대 건축을 ‘감정의 서사’로 확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리베스킨트는 이 건물의 형태를 번개처럼 찢긴 궤적으로 설계했다. 그는 "유대인의 부재가 독일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남아 있는가"를 공간으로 증언하고자 했다. 그가 제시한 답은 형태가 아닌 균열과 공백이었다. 내부에는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은 '보이드(Void)'가 수직으로 관통한다. 그 보이드는 침묵의 축이며, 동시에 사유의 축이다.

지그재그 형태로 설계된 유대인 박물관은 단절과 상실을 상징한다. © architekturaibiznes.pl

관람객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좁고 어두운 통로, 불균형한 벽, 닫힌 출구들이 이어진다. 그 불편함 속에서 사람들은 묻게 된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망각은 죄인가?" 리베스킨트는 답한다. "건축은 잊혀진 이야기의 흔적을 드러내는 장치다."

티타늄-아연 외피와 교차된 구조물의 계단은, 단절된 역사와 상처의 흔적을 따라 빛과 기억이 교차하는 공간을 형상화한다. © Jewish Museum Berlin
비틀린 벽과 침묵의 공간은 단절된 역사를 따라 걷는 감각을 만들어내며, 발아래 깔린 철제 얼굴들은 기억의 무게를 소리 없이 전한다. © Jewish Museum Berlin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이 콘크리트 공간은 유대인의 상실과 고독을 상징한다. © architekturaibiznes.pl

그의 실마리는 감각이 아니라 윤리의 차원에 놓여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 이미 사라진 것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행위. 그에게 건축은 '기억의 형식'이며, 실마리는 그 기억의 조각을 다시 세상 속으로 꺼내는 작은 틈이었다.


빛과 어둠이 나누는 대화


언뜻 보면 칸과 리베스킨트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칸은 빛과 물의 조화 속에서 명료함을 추구했고, 리베스킨트는 어둠과 균열 속에서 불편함을 설계했다. 하나는 존재의 찬가이고, 다른 하나는 부재의 애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건축은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칸은 존재하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빛, 물, 하늘, 돌. 그는 재료가 원하는 형태를 발견하고자 했다. 리베스킨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라진 사람들, 망각된 역사, 침묵당한 기억. 그는 부재 속에서 증언의 형식을 찾고자 했다.


만약 칸이 유대인 박물관을 설계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빛으로 부재를 증언했을 것이다. 리베스킨트가 어둠으로 증언한 것처럼. 결국 빛과 어둠은 같은 침묵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둘 다 '듣는 행위'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칸의 빛과 리베스킨트의 어둠은 모두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들에게 실마리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겸손이었다. 칸이 "도서관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듯, 리베스킨트 역시 "역사는 무엇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가?"라고 물었다. 질문의 방향이 자기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할 때, 실마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실마리가 손짓하는 순간


실마리는 대개 멈춤의 순간에 찾아온다. 길을 걷다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행위는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실마리를 맞이하기 위한 예비 운동이다. 건축이 땅의 결을 읽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마음의 결을 읽는 일이다. 결을 읽지 못한 채 쌓아올린 구조는 금세 무너진다.


칸과 리베스킨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듯, 당신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 순간 세계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수 있다면, 길은 열린다.


그날 나는 한 줄을 적었다.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가장 섬세한 소리가 들리는 상태다." 그 문장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문장을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이다. 세상이 이미 말하고 있던 것을, 우리가 늦게 듣는 일.


실마리는 완벽한 계획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다음 한 줄을 쓸 힘을 건넨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불완전함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세상은 그제야 다시 말을 건다. 이번엔 당신의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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