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보여주기의 철학
삶에는 언어가 닿지 않는 지점이 있다. 감정이 너무 크거나, 너무 섬세해서 말로 꺼내는 순간 형태가 무너지는 그런 지점. 그 침묵의 틈에서, 사유는 조용히 피어난다.
술잔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번졌다. 도시계획 스마트시티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배와 나는, 늘 그렇듯 말보다 생각이 먼저 움직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속에 분명히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있는데, 그걸 단어로 꺼내려 하면 텅 빈 느낌이야. 이 공허함, 너도 알지?"
후배가 잔을 천천히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형. 언어는 기호일 뿐이잖아요. '사랑해'라는 세 글자도 연인에게 속삭일 때와 가족에게 습관처럼 말할 때, 그 무게가 완전히 다르죠. 말로 하는 순간, 이미 원래의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이 되는 것 같아요."
창밖의 불빛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듯 깜빡였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세계가 어쩌면 더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을 뿐이었다.
친구가 실연당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괜찮아?"라고 물으면 "응, 괜찮아"라고 답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괜찮아'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목소리의 떨림, 눈가의 붉어짐, 잔을 쥔 손가락의 힘. 말은 거짓말을 해도, 몸은 진실을 보여준다.
혹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의 식사 자리. "요즘 어때?"라는 어머니의 질문에 "잘 지내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너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숨어있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불안한 미래, 외로운 밤들. 그걸 어떻게 밥상 위에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냥 "잘 지내요"라고 말한다.
박진영이 말했다.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 노래를 부를 때 중요한 건 음정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숨을 어디서 쉬는지, 어디서 여백을 두는지, 그 공백 속에 감정이 담긴다. 말도 마찬가지다. 침묵, 머뭇거림, 쉼표 하나가 때론 수천 단어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브런치 화면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 느낀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키보드로 옮기는 순간 뭔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문장을 고치고, 단어를 바꾸고, 다시 지운다.
"이게 아닌데…" 하며 백스페이스를 누른다. 결국 발행 버튼을 누르겠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 글자들 사이 어딘가에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우리는 늘 '보여주기'로 소통하니까.
어머니는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지만,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신다. 친구는 "힘들어?"라고 묻지 않지만, 그냥 옆에 앉아 같이 담배를 피운다. 연인은 "보고 싶어"라고 문자하는 대신, 퇴근길에 그가 좋아하는 빵을 사온다.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이 떠오른다. 병실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0분쯤 그렇게 있었을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잘 살아라' 같은 모든 말들을 나눴다. 말없이.
카페에서 늦은 밤까지 작업하는 사람 옆에, 친구가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놓고 간다. "힘내"라는 말보다 그 따뜻한 컵이 더 많은 걸 전한다.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찾아가서 "빨리 나아"라는 뻔한 말 대신, 그냥 손을 꼭 쥐어준다. 그 온기가 어떤 위로의 말보다 깊이 닿는다.
음악가는 슬픔을 정의하지 않고 슬픈 선율로 보여준다. 무용가는 고독을 설명하지 않고 몸의 긴장으로 보여준다. 화가는 절망을 묘사하지 않고 색의 어둠으로 보여준다. 연인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 침묵의 무게로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보여주기'다.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을 행위와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금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20세기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짧은 책 한 권으로 철학계를 뒤흔들었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오해했다. 말할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달랐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말할 수 있는 것들 - 사실과 논리의 세계.
말할 수 없는 것들 - 윤리, 미학, 삶의 의미.
그리고 후자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말해질' 수 없을 뿐, '보여질' 수는 있다.
그가 한 사유는 서양 철학 전체에 대한 전복이었다. 그동안 철학자들이 2000년 동안 말로 설명 했던 모든 시도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 모두가 진리가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났다.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과 지내며 그는 더 깨달았다. 언어는 단순한 묘사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해"라는 말이 연인 사이에선 고백이지만, 친구 사이에선 농담이 되듯, 언어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같은 말도 누가, 언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그가 남긴 철학은 결국 이것이었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 너머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 말할 수 없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날 밤, 술자리가 끝날 무렵 후배가 말했다. "결국 우리가 찾는 건 말이 아니라 느낌이겠죠."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소통을 시작한다. 상대가 말을 고르는 시간, 잠시 눈을 내리깔 때의 망설임, 잔을 비우는 속도 속에서 마음을 읽는다.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전달된다. 말보다 느린 속도로, 그러나 훨씬 깊게.
우리 삶의 진짜 가치는 측정되지 않는 곳에 있다. 목적 없이 걷는 산책길의 여유, 예상치 못한 순간의 미소, 이유 없이 좋아지는 기분. 이런 것들을 보고서에 쓸 수는 없지만, 이것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후배가 계획하는 스마트시티도, 내가 지금 쓰는 이 글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아무리 정성껏 단어를 골라도, 우리가 정말 담고 싶었던 것은 그 틈새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보여주기'는 결국 삶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날의 대화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아직 내 안에서 말없이 이어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후배가 보내온 카톡은 단 한 글자였다.

나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게 우리의 대답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이모티콘 하나가 그날 밤 나눴던 모든 대화를, 말할 수 없었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조용히 보여주려 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며, 당신만의 '말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함께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한 뒤, 문득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사유는 이제 방향을 묻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의 여정은 어떤 좌표 위에 서 있는가. 다음 장에서, 나는 그 질문의 방향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