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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Oct 21. 2024

'나는 솔로'를 아내에게 적용해 보았더니

내내 몰랐던 걸 TV 프로그램으로 알게 되다

얼마 전 대학 동창들 모임이 있었다. 중년 남자들이 만나면 늘 이야기는 뻔했다. 돈, 승진, 건강을 안주로 부어라 마시던 중 A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야. 너희들 '나는 솔로'란 프로그램 보냐? 이번에 광수랑 영자랑 결혼한다는데 신기하데."

"맞아. 근데 나는 잘 될 줄 알았어. 둘이 은근 잘 어울리더구먼."

"나는 상철이랑 정희도 왠지 커플 될 것 같아."

"옥순은 표정이 좀 그래. 웃으면 좋으련만."


이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신나서 떠들기 시작하는데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한 참 시끄럽다가 조금 잠잠할 때 슬쩍 물어보았다.


"그게 그렇게 재밌냐?"

"뭐야? 실배, 아직도 안 본거야?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얼른 봐봐. 아참. 내가 추천해 줄게. 모솔이랑 돌싱특집이 제일 재밌어."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는 내내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원래부터 짝짓기 프로그램에 별 흥미가 없었던 터라 '나는 솔로'란 프로그램이 나온 걸 진즉에 알면서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저 뻔한 이야기로 치부했다. 일단 친구가 추천해 준 회차부터 보기 시작했다.


기본 구성은 이랬다. 통상 6명의 남녀가 출현하고 이들에게는 영식, 상철, 영자, 순자 등 듣기에 촌스러운 이름이 부여된다. 보다 보니 이름에도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영수는 가장 나이 많은 출현자이고, 광수는 학력 수준이 높은 엘리트 이미지이고, 영철은 직진남 스타일이고, 순자는 가장 나이가 어리고, 옥순은 외모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식이다.


정해진 장소에서 남성부터 한 명씩 나타나 나무에 걸린 자기 이름표를 갖는다. 그때부터 그 이름으로 불린다. 이제 이들은 5박 6일간 자신에게 맞는 이성을 찾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첫인상 선택부터 쫄깃한 긴장감이 흐르는데 이때는 역시나 외모적인 부분이 크게 어필된다. 한 출현자에게 여러 명이 몰리고, 한 표도 받지 못해서 침울한 상황도 발생한다. 하지만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숙소에 배정받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요즘 유행하는 플러팅이 난무한다. 적극적으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다가가 자신을 어필하거나, 대화를 요청한다.

처음부터 순탄하게 마음이 통하는 짝을 만나기도 하지만, 계속 갈팡질팡하며 헛물켜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방심하긴 이르다. 커플이 되는 듯 보여도 순식간에 틀어지기도 하고, 그 빈틈을 놓칠세라 파고드는 모습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면 숙소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데이트를 할 수 있는데 아무런 선택을 받지 못한 이는 숙소에서 홀로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 잔인하지만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한다.


이때 분위기를 한 껏 고조시키는 이가 있으니 바로 빌런이라 불리는 캐릭터이다. 이들의 활약은 실로 놀랍다. 관계와 관계 사이를 이간질하고, 상대방의 감정은 보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고, 물리적 충돌 직전까지의 갈등을 유발한다. 보다 보면 내 마음도 이입되어 화가 치밀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울컥해서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주책이 없네. 정말 그대로의 모습이 가감 없이 나오는 점이 프로그램의 가장 장점인 듯했다.

어느 순간 미치도록 몰입되었다. 프로그램의 끝을 알리는 레이디 가가의 음악이 나오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고, 다음 회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자꾸 보다보며 눈에 띄는 점이 있으니 바로 대화였다. 출현자들마다 이상향을 꼽는데 빠지지 않는 것이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을 보다보면서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외적으로 훌륭하고 조건이 좋은 대상이라도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었다. 그건 단순히 말이 잘 통한다는 것과는 구별되었다. 일종의 대화 스킬인데 상대방을 배려하면서도 말해야 할 점은 분명히 표현하고 또 서로 티키타카 잘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세심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야 가능했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 꽂힌 부분은 바로 이거였다. 아내와 결혼 전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관심사도 비슷했고, 유머코드도 맞고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대화만으로 하루를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결혼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무엇이 문제인지 소통이 어려웠다. 어느 순간 아내는 나에게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답답했다. 정확히 말은 해주지 않으니 내 입장에선 일방적으로 문을 닫는다고 느꼈다. 그런 오해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아내와의 연애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 아내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아내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했다. 그에 반해 지금을 반추하면 주로 내 이야기하기 바빴고, 아내가 하는 말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태도가 반복되면서 아내 입장에서는 벽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나는 솔로'에 나오는 빌런이 바로 나였다.


이번 주 금요일 퇴근길에 아내에게 연락했다. 아이들도 학원에서 늦게 오는 날이니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다행히 아내도 약속이 없었고, 좋단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집 근처 이자카야로 정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어서 인기가 많았다. 아내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아내를 기다리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듬직하고 공감을 잘하는 남 영호이고, 아내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 옥순이다.


아내가 도착했다. 밝게 웃으며 맞이했다. 정성스레 수저를 놓고 물도 따랐다. 메뉴판을 건네어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아내는 '이 사람 왜 이래?' 하는 의혹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말을 꺼내는 대신 기다렸다. 살짝 침묵이 흐르고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에 지인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었단다. 구체적 상황을 설명할 때 나는 또렷이 아내 눈을 쳐다보며 "힘들었겠네.", "그러면 열받지." 등등 반응만 했다. 전에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비슷한 상황의 내 이야기를 꺼내 그대로 덮어 버리곤 했다. 최악은 해결책만 찾아주려 했다는 점이다.


오롯이 아내 말에 집중하니 그 상황이 이해되고 절로 공감이 되었다. 다음 주제는 BTS였다. 올 것이 왔구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조만간 같이 아미로 활동하는 분들과 모임이 있을 예정이라는데 한눈에 보아도 흥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잘 모르는 주제일 땐 질문이 정답이다. 어떤 멤버를 위해서 모이는지, 가장 좋아하는 멤버인 뷔는 군생활 잘하는지, 최근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물어보니 이야기가 봇물이 터졌다. 나 역시 덕분에 모르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나왔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군대 이야기는 해병대를 가고 싶다고 말한 아들로 이어졌다. 그 뒤로 공부가 걱정인 딸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티키타카가 되었다. 발그레한 볼에 자주 웃고 밝게 말하는 모습은 연애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하네. 갑자기 심쿵했다. 아내는 슬며시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바르곤, 잊었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술에 취했고, 분위기에 취했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 시간은 깊고 오묘하며 찬란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주말 동안 아내의 기분은 정말 좋았다. 평소 목소리보다 두 톤은 높았고, 말 끝엔 애교가 살짝 묻어 있었다. 역시 대화가 중요했구나. 진즉에 깨달았으면 좋았으련만.


뜻하지 않는 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때가 있다. 평소 즐겨 보지도 않는 TV 프로그램에서 해법을 찾을지 누가 알았나.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이대로 주욱 직진해 보자고. 아니 아니 이건 직진남 영철 이잖아. 다시 영호로 빙의해서 잘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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