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세평의 늪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는 일 경계하기
처음 직장에 입사하고 존경하는 부서장이 있었다. 잘 된 일은 부서원들 덕으로 돌리고, 잘 못된 일은 본인 탓으로 했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다. 부서장님이 퇴직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단 둘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두 가지 당부를 했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가보처럼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하나는 남들보다 너무 앞서가면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적당히 중간보다 조금 앞 정도로만 유지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나를 떠올렸을 때 좋은 소리는 하지 않더라도 절대 나쁜 말은 듣지 않도록 생활하라는 조언이었다.
직장 다니면서 두 가지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후자는 세평이란 이름으로 한번 굳어진 이미지는 되돌리기 쉽지 않았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이 풍선처럼 부풀려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나중에 사실 확인을 통해 속상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소문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서장의 조언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인사이동 시즌이 되면 새로 부서로 전입 오게 된 직원들로 인하여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다.
"김대리 00은 좀 어때?"
"아휴 말도 마세요. 전에 00과 같이 근무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일처리도 덤벙대고, 성격도 까탈스럽데요. 절도 우리 과로 받으면 안 됩니다."
"전 과장, 00이랑 같이 근무한 적 있지."
"아 넵. 사람 정말 괜찮아요.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하고 주변 관계도 좋고. 에이스입니다."
이런저런 세평이 모여 부서원 배치하는 회의 때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가 평이 좋은 직원을 받으려고 언성까지 높이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승리한 부서장은 의기양양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과원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세평 따라 그 부서가 잘 돌아가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다만, 시작부터 좋은 인상이냐 아니냐는 이후 그 사람이 부서에 적응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얼마 전 2박 3일간 지방 출장을 다녀왔다. 타 부서 직원들과 협업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총괄 책임자로 참여했다. 시작부터 부담이 되었다. 잘 아는 우리 과 직원도 아닌 잘 모르는 직원과 함께 일하며 기안 내에 결과를 도출해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함께 가는 직원 명단을 미리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의 이름을 보는 순간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A였다. 일단 자기주장이 강해서(제멋대로란 말도...) 주변과 잘 어우러지지 않고, 업무에 관한 열정도 낮아 부서에서도 골칫거리란 소리를 바람 타고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그 직원이 이번 일의 막내로서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지금 와서 다른 직원으로 바꿀 수도 없고 냉가슴만 알았다.
출발 전에 다 함께 모여서 간단히 회의를 했다. 회의 중에도 내 시선은 자꾸 A에게 머물렀다. 별 행동을 하지 않음에도 왠지 탐탁지 않았다.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고. 나중엔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숙소와 이동하는 교통편과 머물 곳에서의 세세한 일정을 A는 단체 카톡방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직접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살짝 표현이 직설적이고 주장이 강한 편이긴 했으나 오히려 솔직함으로 다가왔고 합리적인 답을 주면 받아들이는 모습도 있었다. 속으로 생각보다 괜찮네라며 안도했다.
실제 출장을 가서도 A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고,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되는데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주변 동료들도 하나 둘 A를 칭찬하기 시작했고 그에 힘을 받았는지 더욱 열정적으로 일했다. 모두가 노력한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마무리되었고, 마지막날 여유롭게 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A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회사생활로 흘렀다.
평소 A는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못돼서 의견이 다를 때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 점이 의도와 다르게 전해져 관계에서 오해를 쌓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갈등을 종종 겪었다고 한다. 본인의 이런 점을 조심하려고 노력 중인데 한번 형성된 이미지는 발이 달린 듯 주변에 계속 퍼져서 많이 속상했다는데 그 말에 많이 찔렸다. 나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고 들은 소문에 따라 A를 평가했다. 미안함에 순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A는 본인의 장단점에 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고, 노력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이전 기관에서 여러 일들을 겪고, 이곳에 와서는 잘 지내고픈데 근시가 컸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래서 자원했고 노력한 모습을 다들 알아봐 주어서 뿌듯하다고 했다. 나 역시 누구보다 훌륭하게 잘 해내어 고맙다는 말을 연신했다.
피곤했는지 조금 있다가 A는 잠이 들었고, 나는 차장 밖을 바라보며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평이란 과연 무얼까. 직접 겪어보지도 않고,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생각해 보니 두렵기까지 했다.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분명 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작은 정보만으로 형성된 이미지가 있으리라.
그걸 깨닫고 나니 앞으로 정말 경계하고 조심해야겠단 각오가 절로 들었다. 예전 부서장의 당부 두 가지와 더불어 '섣불러 판단하지 않기'도 마음 깊이 새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