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할 때보다 설레고, 탑승할 때보다 신나고, 바라볼 때마다 뭉클한
파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
바깥 풍경마저 들뜬 기분
때가 왔어 하늘 위로 나는 순간이야
<비행기>, 거북이 2006
생각만 해도 신나는 풍경이다. 넓고 긴 활주로를 앞에 두고 경쾌한 속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수많은 땅콩 과자도 함께 챙겨 높디높은 하늘을 비행하는 쇳덩어리.
인류가 "하늘을 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지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비행"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설렘과 경이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국제 여행은 커녕 국내 여행마저 어려워지고, 비행기 운행 편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이토록 비현실적인 일상에 대해 과거형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당최 어디를 향할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심지어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기에도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종종 말씀하시던 '콧바람 쐬는 일'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지치고 조급한 일상의 속도를 잠깐씩이라도 늦추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 잃어버린 개인의 생기를 되찾기 위한 이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의 고생과 희생이 뒤따른 덕분에 지구 각국에서 코로나 19전 삶의 방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당연한 이치에 부합하듯 대한민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마스크 없는 맨 얼굴이 더 어색해지려던 찰나 우리는 공공시설 및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라는 최종적 일상 회복 시그널을 마주하게 되었다.
덕분에 좀 더 본격적으로 해외 일정을 잡기 시작했다. 언제나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을 품고 조금 더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차있는 나는 해외 경험이 가능한 모든 기회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으로서 선택지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작년부터 코로나 19 음성 결과를 전제로 한 해외 학회 일정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첫 논문 게재 후 휴가는 유럽 파리로 다녀왔으며, 올 초에도 북미 시애틀과 밴쿠버 지역에서 개최된 학회에 다녀왔다. 작년 여름에만 해도 코로나 19 음성 결과지를 제출하기 위해 추가로 초래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 작년 가을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출입국시 특별한 확인 절차는 사라졌으며, 올 초 시애틀로 출국하는 델타 항공기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사항이 아닌 '권고'사항이었다. 즉 탑승자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눈치를 좀 보긴 했지만 여유롭였던 좌석 덕분에 마스크 없이 꿀잠을 잤고 시애틀에 도착해서 학회 일정을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시애틀/밴쿠버 학회를 다음으로 5월 말 싱가포르 학회와 유럽 여행, 그리고 8월 중순 미국 파견 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싱가포르 역시 처음 가보는 나라이고, 이번 유럽 일정은 암스테르담과 베를린을 구경할 계획이며 앞으로 6개월 동안 다녀올 파견 연수는 미국 플로리다 주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차곡차곡 계획했던 일은 아니지만 인생의 대부분 일이 그렇듯 어쩌다 보니 행선지가 결정되게 되었고 최대한 틈날 때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출국 준비를 하고 있다. '출국 준비'라고 해봤자 거창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나에게 '출국 준비'란 '구글맵 (Google Map)'과 가장 큰 연관이 있다. 우선 어플에서 새로운 폴더를 만든다. 폴더명은 대부분 [여행지] 그리고 [여행하는 연도]인데 예를 들어 작년에 파리 여행을 계획하며 만든 폴더 이름은 "Paris'22"이고 다음 달 싱가포르 여행을 대비하여 만든 폴더 이름은 "Singapore'23"이다. 파리를 두 번 가게 될 수도 있고,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지만 우선 그때 가보고 싶었던 곳, 그리고 실제로 방문에 성공한 곳을 한눈에 정리하는 데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서 선택했다. 숙소 위치가 이미 정해졌다면 지도 위에 숙소를 '핀 (pin)'해둔다. 그 후에 주변 커피숍을 찾는다. 평점이 높다거나, 가장 최근에 업로드된 리뷰 사진 속 라테아트가 유독 예쁘다거나 (또는 커피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베이커리 메뉴가 특히 먹음직스러워 보인다거나), 영업시간이 내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다면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행 가면 유독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나는 버릇(?)이 있다. 아직까진 가성비가 아쉬운 숙소 조식보다는 이른 시간부터 문을 연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베이커리를 사 먹는 게 더 좋다.) 반드시 기록해 두고 직접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또는 걷다가 그 옆에 또는 그 앞에 더 마음에 드는 커피숍을 발견한다면 그때의 기분에 따라 목적지를 변경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계획형 인간이 허락할 수 있는 나름의 유동성이랄까.)
사실 학회 참석을 위한 해외 일정은 아무래도 자유도에 있어 한계가 있다. 듣고 싶은 (들어야 하는) 기조연설도 (Keynote speech) 있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으며, 앞으로 연구 방향성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포스터 발표도 성실하게 참여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내가 참고할만한 재밌는 내용의 분석을 수행 중인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혹시 모를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해진다. '만남'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을 만나고, 영감을 받는 일. 그게 바로 학회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일테니 말이다.
출장의 성질이 더 짙은 학회 일정과 달리 개인 휴가 일정의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하루의 취향>의 김민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자로서의 임무는 "오롯이 내 것인 시간을 앞에 두고 내 맘대로, 내 취향대로 그 시간을 소화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여행 목적지 지도는 각양각색의 핀들로 뒤덮이기 시작하고 과연 주어진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가장 효율적인 동선은 무엇일지, 언제 먹고, 언제 마시고, 또 언제 사야 할지에 대한 어렴풋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구글맵에 수많은 핀으로 구경할 곳을 정해둔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계획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도 계획 수행이 어려운 이유는 많다. 바로 예상치 못한 구경거리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작년 가을 언니와 함께 여행했던 파리의 첫날이 딱 그랬다. 그날의 계획은 "시내에 가서 여행 기간 동안 사용할 뮤지엄 패스 실물카드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어차피 여행 일정 중 8일 정도가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파리라는 도시를 급하게 둘러봐서 뭐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그저 걸었다. 지치지도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살짝 지치는 건가 싶으면 버터향이 짙은 블랑제리 앞에 멈추어 크루아상과 커피를 구매했고, 목이 마른 건가 싶으면 이태리식 젤라테이라 앞에 멈춰 섰다. 당이 떨어진다 싶으면 마카롱을 맛 별로 구매하여 각자의 고유한 맛과 향을 음미했고, 결국 지쳤다 싶으면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그와 어울리는 부라타 치즈 샐러드, 라자냐, 그리고 프랑스식 치킨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볼 것도 많고, 살 것도 참 많았다. 건물 하나하나 아직은 그 용도와 역사를 잘 모르지만 어딘가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는 말도 안 되는 감상평을 남발하며 사진으로 기록하고, 건물의 아름다운 자태를 실컷 구경했다. 어지럽게 놓인듯한 그 배치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되는 도심 속 초록색 벤치들은 여행자들에게 잠깐 앉아서 쉬어가라고 속삭였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일어서면 예쁜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진열하고 있는 옷 가게에 들어가 당장이라도 #ootd를 외쳐야 할 것처럼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보고 여행이라서 가능한 합리화를 십분 활용하여 구매까지 이뤄냈다. 그때 알았다. 구글맵은 절대적인 여행 계획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전조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어야 아는 만큼 더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어느 동네에서 무엇이 등장할지 어렴풋이 알고 있을 때 그 세심한 디테일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암스테르담 그리고 베를린 여행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유럽 생활을 하게 된 언니를 보러 갑작스럽게 결제한 유럽행 비행기 포다. 결제 전까지 걱정도 두려움도 많았다. 비용 때문이라기보다는 바쁜 연구실 생활과 지도 교수님께 파견 연수 전 휴가 계획을 말씀드리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매번 학생들 입장에서 먼저 배려해 주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인 나는 혹시라도 그를 실망시키거나 자랑스러운 학생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냈다. 벌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2023년, 열심히 상반기를 살아내고 잠깐 콧바람을 쐬러 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이보다 더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싶은 마음에 (어머니께서 충전해 주신 추진력을 발판 삼아) 비행기표를 결제했고 그렇게 일주일간 언니와 두 번째 유럽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이미 현지인이 되어버린 언니지만 말이다. 무튼 결제하고 나니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막상 결제하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냥 가면 되는 거다, 체력이 허락할 때. 여윳돈이 허락할 때. 누군가 그랬다. 학생 때는 체력과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고, 직장인일 때는 체력과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고, 은퇴 후에는 시간과 돈은 많은데 체력이 바닥난다고 말이다. 당장 대학원생으로서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충분치 않고, 체력도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짬이 났을 때, 조금이라도 각이 보일 때, 더 실컷 탐험하고, 여행하고 구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올해, 내 이십 대 마지막이 끝나기 전 더더욱 이 다짐을 상기하며 지내보려고 한다.
슬슬 장시간 비행이 힘들긴 하지만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어도 이코노미석 10시간 이상 비행은 정말 고되다. 무릎도 아프고 어디 넓은 공간에 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다운독 자세로 몸을 풀어내고 사바아사나로 낮잠을 청하고 싶어 진다.) 내가 그 속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난 오히려 장시간 비행을 '합법적 노는 시간'으로 삼고 밀린 일기 쓰기, 글 쓰기, 독서, 사진 정리하기 등의 시간으로 활용한다. (지독한 효율쟁이...) 그래서 여행 준비를 충분히 못했을 때도 장시간 비행을 앞두고 있다면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생각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거워도 꼭 여행책을 한 권씩 챙기고, 아무리 귀찮아도 노트북이든 태블릿 PC든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 끄적일 수 있는 디바이스를 챙긴다. 나의 열 시간은 소중하니까 말이다. 올여름 플로리다 까지는 환승과 더불어 무려 17시간을 비행해야 하는데 내 몸과 마음... 잘 버텨주길 바란다.
올해 큼직한 일정들에 대한 비행기표 구매는 이미 마쳤다. 다가오는 5월 역시 학회 준비로 바쁘겠지만 이를 살아내고 나면 언니와의 두 번째 유럽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또 이를 마치고 나면 연수 준비 후 미국으로 출국하게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얼마나 바쁠지, 어떤 실험과 분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또 어떤 공부를 해내어 졸업 논문에 도움이 될 결과를 들고 귀국할 수 있을지 생각할 것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일단 나에게 '안식학기'를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 2014년 가을부터 한 학기도 쉼 없이 달려왔다. 같은 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는 바람에 벌써 대전 생활 10년 차를 앞두고 있다. 인생에서 6개월쯤은, 한 번쯤은, 세상을 내 눈에 담으며 콧가에 바람을 충전해도 괜찮지 않을까? (제발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누구든 말입니다.) 건강한 마음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비행기표를 넘겨보며 그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도록 여행의 신이 매 순간 나와 함께 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