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급한뭉클쟁이 Jul 30. 2023

우물 밖 대학원생 in 싱가포르

나 어쩌면 연구 사랑할지도

가까이서 보면 '카오스 (chaos)' 그 자체지만 멀리서 보면 특별한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는 대학원 생활. 시간의 단위를 하루씩 쪼개서 살펴보면 대학원생이 매일 해내야 하는 일들은 참 많다. 실험과 분석은 기본이요, 진행 사항은 없는데 야속하게도 매번 돌아오는 나의 세미나 발표 차례에 맞춰 자료를 준비하고, 동료들과의 디스커션, 특히 지도 교수님과의 미팅을 앞두고는 결과를 정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유독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연구는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밤늦게 예약해 둔 실험 장비 사용을 마치고 터벅터벅 연구실로 돌아올 때면 많은 생각이 들곤 한다. 매일 반복되는 대학원생으로서의 삶. 이렇다 할 결과나 성취 없이 계속해서 하던 일을 반복해도 괜찮은 걸까? 일상의 하이라이트 없이 정지 상태의 (static) 연구실 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쯤 연구에 대한 권태도 함께 밀려온다.


"나 계속 연구해도 괜찮을까?"


분야를 불문하고 이런 고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대학원생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특히나 청춘을 투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도피성 대학원 입학은 아니었으나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취직을 준비했다면 (그리고 운이 좋게 성공했다면) 이미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을 텐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고 본인에게 편안한 라이프 스타일이 응결됐다면 인생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게 되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대학원생에게 '안정감'을 주는 요소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학위를 무사히 마치게 될 것인지, 졸업하고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전공 분야를 살려서 해외 포닥을 나갈지, '박사' 타이틀을 살려서 비슷한 분야의 기업에 취직 준비를 시작할지, 그리고 누군가 나를 '박사님'이라고 불러준다면 내가 과연 그 명성에 부합한 실력과 지식을 겸비하게 될지 등 정해지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 준비 됐다는 가정 하에 "운"도 따라야 하고, 앞으로 수많은 변수들 사이에서 차곡차곡 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연 나는 홀로 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인지, 또는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조율하며 내 졸업 후 삶을 그려나갈 것인지 역시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구" 자체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아무리 내가 선택한 연구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해도 현실적인 고민을 뒤로하는 본인의 모습이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에 맞춰진 "시기"에 대한 기준을 애써 무시한 채 안정성을 추구하는 대신 끊임없이 도약하려는 모습에 스스로 심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한 마음가짐과 함께 계속해서 도전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매번 그렇듯) 서론이 굉장히 길어졌는데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하다. 이번 싱가포르 학회를 통해 대학원 생활에 대한 동기 부여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성향이기 때문에 열심히는 하고 있었다. (나름) 하지만 이번 학회는 유독 특별했던 것이 "왜" 잘하고 싶은지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생각 정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회 참석을 통해 나는 (학계든 산업이든) 졸업 후 직장을 구할 때 먼저 영어로 일할 수 있는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어적' 자아와 '한글적' 자아를 굳이 비교했을 때 전자의 경우에서 훨씬 더 '쿨 걸 (cool girl)'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는 점을 느껴서인데 그렇다면 내가 정의하는 '쿨 걸'은 누구인가?


내가 정의하는 '쿨 걸'이란 대범하고 자신감 넘치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지조 있게 행동하고 발언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실력을 기반으로 한 근거 있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동료들과 소통할 때 좀 더 용기 있게 의견을 내고 디스커션을 이어가는 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쿨 걸'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범한 모습은 나의 모국어인 한글로 소통할 때보다 영어로 소통할 때 더욱 잘 발현되는 것 같다. 이전 글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살게 되었다. 영국 국제학교를 다니며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 교육과정을 전부 다 영어로 밟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교육에 필요한 전문적인 (professional) 사고는 영어로 하는 것에 좀 더 익숙해졌다. 잦은 토론 수업과 발표, 그리고 글쓰기 훈련을 받으며 충분한 근거를 확보했다면 쫄 것(?)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고 따라서 영어로 소통할 때 더 잘 나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모국어인 한글로 소통할 때는 조심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한국어에는 존댓말이 존재한다. 대화 상대가 어른이거나 연장자의 경우 내가 충분히 공손한 지부터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말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하기에 따라 뜻이 사뭇 달라지는데 이 과정에서 쌓일 수 있는 오해나 서운함, 그리고 이들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이 다소 피곤하게 느껴졌다. 결국 대화의 내용보다는 청자와 화자 간의 관계성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예상치 못한 오해를 막기 위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 보면 계속해서 조심하고 그만큼 소심한 자아가 형성되는 것 같다.

싱가포르 Suntec Convention Center에서 개최된 2023년 RNA society Annual Meeting 학회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학회에서는 이와 같은 나의 모습에 대해 좀 더 굳건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학회에서는 학생 대표로서 활동하며 특정 세션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 덕분에 평소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임할 수 있었다. 먼저 박사학위과정을 마치고 포닥이나 학계 (academia) 또는 산업 (industry)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니어 과학자들 (Junior Scientists)'을 위해 바이오 관련 산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Genentech, New England Biolabs, Moderna 등 다양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박사님들을 초대했고 그들의 커리어 이야기를 듣고 세션 참가자들과 함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번 세션에서 MC로 활약하며 서로 비슷한 진로 고민을 겪고 있는 주니어 과학자들 간 유대감 형성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했고 나 역시 미래 진로 고민에 대한 현식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큰 미팅 홀에서 진행되었던 주니어 과학자 세션. 초대에 응해주신 바이오 기업 연사님들과 질의응답에 다양한 질문을 제출해주신 참석자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다.
열심히 기조 강연을 들으며 "난 언제쯤..."이라는 생각을 한 대학원생 1...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차오르면 될 일도 안된다! 차근차근 실력을 다지기로 결심한다. 

학회 기간 동안 학술적인 세션 외에도 다양한 네트워킹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그 시간 동안에도 스스로를 학생 대표로 소개하며 학회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연구적 그리고 연구 외적인 대화 주제를 바탕으로 서로와 교류했다. 국내 학회에도 술을 곁들인 세션이 없지 않지만 형성되는 분위기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했다. 한국에서는 "긴장 완화"를 위해 술이 비치된 식사 공간이 흔하지만 대학원생의 경우 결국 연구실 동료와 함께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해외 학회에서는 앉을자리 대신 한 손에는 와인, 다른 한 손에는 접시를 들고 계속 돌아다닌다. 그리고 함께 대화할 사람을 찾는다. 어느 자리에 껴서 밥을 먹으면 재밌을지, 내가 만나고 싶던 연구 책임자는 (Principal Investigator; PI) 어디 있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며 내가 학회에 와서 만나고 싶었던 대화 상대를 찾아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많은 내향인 (Introvert)에게 다소 버겁게 느껴지는 도전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I 성향이 더 강하지만 학회 기간 동안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해외권 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나를 알리고 대화를 유도하여 서로의 이해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기회를 얻어내는 과정 자체가 실력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같은 '물'에서 놀고 싶다면 정해진 룰을 따르고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까진 실력도 경험도 부족한 박사 '과정생'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연구원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맛있는 와인과 케이터링 되는 음식을 즐기며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학회 기간은 금방 끝을 향해 달려간다. 개인적으로 학회의 하이라이트는 네트워킹도 아닌, 전 세계 저명한 교수님들의 기조 강연도 아닌 (죄송합니다) 포스터 세션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연구'를 본인의 커리어로 선택한 사람으로서 포스터 세션은 스스로 하여금 나의 연구적 자아가 살아있음을 느껴주게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과학자들은 어떤 연구를 하고 있고 어떤 주제에 관심이 많은지에 대한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각자 열정 넘치는 모습으로 본인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 가슴이 웅장해짐을 느낀다. "다들 정말 연구에 진심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쳇바퀴 같은 대학원 생활을 겪다 보면 당장 내가 하고 있는 연구가 정말 중요한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마련이다. 아무리 연구가 재밌고 잘 맞아도 어쩔 수 없다. 매일 비슷한 고민과 실험 그리고 분석을 수행하다 보면 포화상태가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때 학회장 포스터 세션에서 발표를 하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내 연구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가끔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프로젝트에도 정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학회 기간 동안 트위터, 링크드인, 리서치 게이트로 DM (direct message)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인정 욕구가 강렬한 성향의 대학원생에겐 이보다 더 큰 뿌듯함은 없다. 학회 일정을 잘 마치고 얼른 돌아가서 다시 일을 하고 싶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빨리 분석해야지... 이 실험도 해보고 저 실험도 해보고... 아직까지 해외 학회에서 구두 발표 대상자로 선정된 적은 없지만 포스터 발표 만으로도 이렇게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니. 물론 졸업 전에 꼭 구두 발표까지 해보고 싶은 게 내 꿈이자 목표다. (뭉클 대학원생 파이팅!)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앞에 있는 Gardens by the Bay에서 진행된 첫날의 네트워킹 세션. 
스파클링 와인과 맛 좋은 케이터링 서비스 덕분에 4시간 동안 앉지도 않고 (못하고) 사람들과 떠들며 재밌는 수다를 이어나갔다. 다들 10년 안에 더 훌륭한 연구자들이 되어있을 듯.
디저트도 끊임없이 제공되어서 카페인/슈가 하이로 지냈던 학회 일정. 싱가포르랑 한국이랑 시차도 한 시간 밖에 나지 않아 편했지만 커피 덕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학회 셋 째날 마련된 "멘토링 런치 (mentoring lunch)" 관심 있는 분야와 주제를 선택해서 멘토의 커리어 조언을 듣고 추가로 질문을 더 나눌 수 있었다. 
학회 세션 도중 지도 교수님과 후배들과 함께 먹은 망고 빙수와 찹쌀밥 디저트. 어렸을 때 상하이에서 사먹던 디저트 생각도 나고 너무 맛있었다!
마지막 날 메뉴였던 케이터링 메뉴와 락사. 학회 기간 동안엔 학회장 밖에서 로컬 음식을 사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마지막 날 시원한 락사 국물을 맛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과학자들도 Dance party를 즐긴답니다? DJ까지 초청되어 춤추던 학회 참가자들. 기조 강연을 빛냈던 대가 교수님도 신나게 춤추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공항으로 이동해야 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후배와 함께 산책에 다녀온 멀라이언 파크. 싱가포르는 빠른 시일 내에 가족 여행으로 한 번 더 와야겠다고 다짐!

이번 학회에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은 "싱가포르"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기보다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학회에서 정말 많은 수의 연구자들을 만나고 심지어 바이오 관련 산업에서 종사하는 연구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다. 해외 기업 취직을 고려했을 때 어떤 방법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보다 더 구체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고, 학생 대표로 활동하며 교류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나의 성향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어떻게 일할 때 가장 빛날지에 대해 또 하나의 경험적 근거를 쌓아 올린 셈이다. 여러 나라의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로 동화되는 문화를 자랑하던 싱가포르라는 도시 국가에서 느꼈던 국제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학회 참석을 통해 발현되었던 나의 강점을 잊지 않고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슬기로운 대학원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이국적이지만 익숙했던 싱가포르에서의 첫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