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급한뭉클쟁이 Oct 29. 2023

내가 바라는 연구실

나도 꽤나 사람 좋아했네.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들이 참 많다. 이번에는 연구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직업적 영역에 (professional sphere) 속해있는 사람들과 아주 가까워지는 일을 꽤나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언제 어떻게 엮이고 틀어질지 모르는 이해관계에 대비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동료들에게 서운함을 사는 일이 생기더라도 항상 신중함을 선택해 왔다. 일하는 공간에서 개인적인 TMI를 (Too Much Information) 공유한 일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고 (이불킥의 순간들을 정말 견디기 힘들어한다),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되려 도리어 나 역시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두는 편이 서로를 상처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지나친 조심함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5년 동안 내가 속해있는 연구실에서는 선택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해 왔다. 일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에는 씩씩하고 공손하게 협조했다.) 대학원생이 유난스럽게 진지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게 유일한 핑계였고 충분한 이유였다. 게다가 같은 대학에서 학부, 석사 그리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만 9년이 넘는 시간을 한곳에서 보낸 덕분에 운 좋게도 가까운 주변에 개인적 영역의 (personal sphere)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연구실 밖 그 사람들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연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외로움을 느낄 틈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플로리다 게인즈빌에서 새로운 환경의 연구실 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동료들과의 연결점"이라는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곳의 실험실에는 연구 인력이 아주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꽤나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본인이 맡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거나, 각자 익숙한 실험 프로토콜에 대해 결함을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 트러블슈팅을 (troubleshooting) 함께 할 수 있는 동료가 부재하다는 점은 생각보다 연구실 생활에 큰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환자 검체를 다룰 수 있다는 명확한 장점이 있는 병원 소속 연구실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결국 혼자 해내야 하는 환경이었다. 이렇게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는 것인가?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바로 옆 자리, 뒷자리에서 비슷한 실험과 분석을 하고 있는, 근접성이 뛰어난 동료들에 대한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 연구실 장비나 시설이 생각보다 더 좋은 편이라 지도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한가득 충전하고 있는 중이다. 돌아가서 열심히 해야지... 

타고난 수다쟁이 성향을 자랑하는 나는 과학 역시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과정을 참 재밌어한다. (박사 고년차가 될수록 실험 말고 디스커션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 속한 연구실에서는 크고 작은 연구적 고민에 대해 논의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과학 이야기를 실컷 할 수도 없었고 이를 통해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옆 랩에 계속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병리학과 교수님 연구실인데 이곳에는 나와 같은 대학원생들도 많고 박사 후연구원 (postdoc) 신분으로 연구실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좀 더 활기차고 실험 장비에 충분한 손 때도 묻어있고 (실험 장비는 자주 사용하면 손 때가 묻어있고, 오랜 시간 사용자 없이 방치된 경우에는 먼지가 쌓여있는 편이다) 훨씬 더 "사람 냄새"나는 연구 환경이라는 점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굳이 그들과 실험 계획을 세우고, 키우는 세포를 옆 랩 인큐베이터에 옮기고, 일부러 시간을 찾아 디스커션을 요청하며 최근 몇 주 동안에는 옆 랩 친구들을 괴롭히며(?)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지난 주말에는 옆 랩 포닥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미국에서 연구하는 것의 장단점과 포닥 이후 커리어부터 결혼과 육아라는 주제까지, 재밌는 대화였다!
덕분에 한국에서 못해본 실험도 배우고 있다. 실험도 실험이지만 나만의 독창적인 연구 질문을 (research question) 만드는게 중요한데 여전히 졸업에 대한 걱정은 많다. 

물론 이들과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토요일 오전 기준 이제 4개월이라는 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서로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따위 없기 때문에 더 평화롭고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문화 특유적 상하관계도 없기 때문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훨씬 덜 하다고 생각한다) 포닥 "선배님"이어도 친구처럼 쉽게 접근하고 말을 붙이고 친해지는 일도 더 쉽게 느껴졌다. 이렇게 이웃랩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실험을 함께하게 되면서 나 역시 동료애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균형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아직도 퇴근 시간만 되면 함께 저녁 먹을 친구를 찾는 대신 (요가원에 들려서 수련을 마치고 간단하게 저녁거리를 장 봐서 그날의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 플레이 리스트를 고민하며) 집에 가고 싶지만 나 역시도 일적으로 너무 혼자 방치되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10년 전 아주 재밌게 봤던 디즈니의 <겨울 왕국 (Frozen)>에 등장하는 "Fixer Upper (Maia Wilson and the Case (Frozen Original Sound Track)" 노래에서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성향의 크리스토프를 안타깝게 여긴 트롤들이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His isolation is confirmation of his desperation for human hugs.


그의 선택적 고립은 다른 인간과의 "포옹" 즉 연결성에 대한 절박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당장 한국에 있는 연구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죽겠다거나 외로움에 사무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편안하게 연결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바에는 거리를 두겠다는 내 지난날들의 행동과 태도들 역시 탄탄한 동료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 생각을 끄적여보는 바이다. 그래서 요즘엔 주말 출근한 연구실 친구들과 가상 커피 챗 (virtual coffee chat) 시간을 갖곤 하는데 마치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유독 진하다. 한국 돌아가면 동료들한테 더 잘해줘야지...


타산지석의 교훈이라는 점이 아쉽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다음 연구실을 선택할 때 고려할 요소들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졸업 후 미국 포닥을 나오게 될 연구실에 대한 환경적 기준이 명확해지고 있다. 지난번 보스턴 여행에서 느꼈던 "교통이 편리한 도시"라는 위치적 기준과 이곳 게인즈빌에서 느끼고 있는 연구실 규모나 동료들 간의 교류 정도, 즉 얼마나 활동적인 연구 환경인지에 대해서 잘 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멀리 나오는 만큼 좋은 환경으로 오는 것도 중요할 테니 말이다.


적당한 거리는 누구나 필요하겠지만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대학원생들 간의 연대감이 유독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워낙 비슷한 환경에서 공부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각자 연구실 생활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추가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가까운 주변에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나름 나만의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옆 랩 친구들이나 어쩌다 보니 요가원에서 사귄 친구 역시 신경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 말년차 대학원생이었다. (심지어 그녀 역시 올해 말부터 포닥 지원을 앞두고 있어 서로의 상황은 유독 더 비슷했다.) 그렇게 고요할 것만 같았던 플로리다 게인즈빌에서도 연대의 중요함을 느끼며 성장하고 있다. 당장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 대한 아쉬움으로 일상을 가득 채우는 대신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연구나 여가생활, 그리고 여기서만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우정과 동료애에 감사하며 현재에 (present)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또 연말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2023년이 저물고 새해가 오면 또 금방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게이트 앞에서 열정적으로 다이어리를 쓰며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11월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할 때면 한국 생각이 많이 나다가도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질 뿐이다. 지금 여기서 받고 있는 건강한 자극들과 복잡한 생각 정리를 위한 소중한 시간들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경험이니 앞으로도 후회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다 귀국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본 곳 중에 가장 시골스러운 플로리다 게인즈빌. 남은 4개월도 잘 부탁해!
작가의 이전글 내 미래는 어떡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