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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Dec 24. 2023

이십 대의 완벽주의와 이별하기

자유롭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겁에 질려있던 나의 이십 대를 보내주며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할 때면 꼭 '코리안 에이지 (Korean age)'를 따로 설명하곤 했었다.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해가 바뀌면 또 한 살 추가되는 게 국룰이야.
12월 31일에 태어나면 한 살이고 바로 다음날 두 살이 되는 거지, 엄청나지?


당연히 그 누구도 엄청나다고 동의한 적 없다. 무슨 계산법이 그 모양이냐고 반문을 하거나 한국 사람들 수학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며 비꼬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친구들과 동의하는 바였고.


그래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나이를 공유해야 할 때는 '국제 나이 (International age)'라는 표현을 빌려 주야장천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만 나이' 개념인데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일 년이 지나면 그때부터 한 살씩 더해가는 훨씬 더 논리적이고 타당한 나이 계산법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생일도 주민등록상 생일이 아닌 음력 생일을 계산해서 챙기고 있는데 여러모로 생일이나 나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부가 설명, 아니 친구들을 상대로 해명을 해야 할 때가 많곤 했다.


그런 '코리안 에이지'가 올해 드디어 바뀌었다. 2023년 6월 28일부터 한국에서도 드디어 만 나이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나이 제도 시행을 앞두고 혼란도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나라 특유의 '빠른 나이' 계산 법이라든지, 태어난 연도수로 '동갑'을 정의하는 시스템이라든지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서 극명하게 나뉘는 우리나라의 사교 문화 탓에 새로운 나이 제도가 사소하지 않은 혼란을 야기한 것 같다.


시행된 지 반년이나 지난 제도에 대해서 왜 이렇게 길게 서론을 늘어놓았냐 하면 내가 이 '만 나이 제도' 덕분에 삼십 대 진입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1995년에 태어나 원래대로라면 이십 대의 끝자락인 스물아홉 살, 즉 아홉수의 한 해를 보내던 중이었다. '서른'처럼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는, 스물아홉이라 하면 딱 떨어지기 바로 직전의 숫자이기 때문에 이십 대와 이별하고 삼십 대를 맞이하기 전 마지막 관문을 상징하는 듯한 숫자처럼 느껴졌다. 내 주민등록증에 출력된 여섯 자리 번호나 태어난 시간 등 실제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나이 제도 덕분에 괜한 씁쓸함을 일 년 뒤로, 아니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2025년 11월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아싸 개이득.


당장은 앞자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올 연말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덜 우울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올여름부터 미국 플로리다에서 교환 연구 학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와 연말 모두 혼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워낙 익숙한 사람이지만 선천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은 편이라 따뜻한 연말 시즌을 아주 혼자 보내는 것에 대해 미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럴 때면 꼭 스스로를 갉아먹는 생각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내내 이미 따뜻함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보낼 연말 연초는 다소 기대가 되는 것 같다. 대전에서의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여행도 정말 많이 다녔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새로운 입력값이자 (input) 자극 (stimulus)이었다. 오히려 잘 곱씹고 소화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따뜻한 날씨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지만 친구들과 쿠키도 나눠먹고 크리스마스 카드로 마음도 표현하고 최근 서부 여행에서는 예쁜 트리도 실컷 구경했다.
혼자 연말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큰 마음먹고 장만한(!) 빨간색 니트. 입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는 옷은 정말 오랜만이다, 올해 가장 마음에 드는 소비 중 하나다 :)

정말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핵심은 아직 본인은 스물여덟 살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도 법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나이 제도를 고려하여 엄밀히 따지자면 서른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4학번으로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10주년을 맞이하는 어른으로서 지난 십 년을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배운 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운 소중한 인생 교훈들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자유가 좋다. 이십 대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십 년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사실 잘 모르겠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 즐거웠고 이를 계속하기 위해선 자유가 필요했다. 학부 전공을 선택할 때도, 진로 고민을 이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유'라는 웅장한 키워드는 그저 구실 좋은 핑계가 아니었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더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있었던 만큼 실수 없이 잘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 실수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다소 현실감 없는 소망과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정중함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해로운 완벽주의가 계속되었고 같은 이유 때문에 나의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아직은 완성된 모습이 아니니까 완벽한지 또는 그렇지 못한 지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하거나 타인으로부터 평가받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지난 십 년 동안의 나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약속한다는 것에 대해 비교적 큰 부담감을 느껴왔던 것 같다.


부담이 가장 적은 약속 상대는 누구일까에 대해 고민하여 내린 결론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본인에게 다소 과하게 집중하는 이십 대를 보내게 된 것도 아마 비슷한 결의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일과였기 때문에 학업, 취미생활, 교우관계 그리고 운동 등에 대해서 시간을 배정하고 정해진 루틴을 따라가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마냥 게을러지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약속 상대는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와의 약속을 통해 스스로에 집중하고 끊임없는 자기 관리를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어보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박사학위 말년차를 앞두고 있는 대학원생으로서 다소 부끄러운 발언일 수 있지만 아직도 내가 무엇을 위해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지 그리고 졸업 후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색을 갖춰서라도 학위과정에 대한 명분이나 목표가 분명해 보인다. 졸업 후 일하고 싶은 회사가 명확하거나 하고 싶은 연구 분야가 분명해서 미국 포닥 생활 후 교수직을 꿈꾸는 친구들도 많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서 계속 학교에 남아있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만큼 미래 계획에 대한 모호함은 나를 무기력하고 대책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든다. '계획'까지는 아니어도 이상적으로 그리는 졸업 후 '꿈'의 모습은 있어야 할 텐데 하고 말이다. 친구한테 선물 받은 '꿈이 이루어지는 부적'을 핸드폰 뒤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사실상 이렇다고 할 꿈조차 정의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러한 나의 성향을 유연하다고 표현해 줄 수도 있지만 박사학위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놓고 계속해서 유연함을 추구하기엔 투자한 자원이 꽤 많은 편이다. 게다가 나는 졸업 후 그 어떤 선택지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예를 들어하는 연구가 잘 되면 쭉 하는 거고 아니면 내 궁금증과 흥미를 자극하는 새로운 조직을 찾아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완벽주의 탓에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야망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온갖 시간과 에너지 투자를 감행하여 야망을 현실화할 동기부여는 없고, 정말 피곤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불필요한 피곤함을 멈추기 위해서 이제는 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막연함을 덜어내고 내가 바라는 나의 '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한다. 그리고 모든 인생에서 마찬가지겠지만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가는 과정에서 내 통제를 벗어난 수많은 변수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고 싶다. 선택과 동시에 박탈당할 내 자유에 대해 슬퍼하는 대신 내가 진심을 담아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매사 혼자서 똑똑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과 닿은 손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용기야 말로 나를 더욱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새로운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고 싶다.


앞서 만 나이 제도 덕분에 삼십 대를 맞이하는 쓸쓸함을 피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지금 보다 더 온전하고 건강할 스스로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JTBC 드라마인 <멜로가 체질>을 보면서 특히 삼십 대에 대한 기대감이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었다. 가장 에너지가 넘쳐나는 청춘의 육체를 갖고 십 년을 세 번씩이나 살아내며 얻은 삶의 교훈을 바탕으로 내 삶의 다양한 순간들 속에서 여유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지금까지 좋은 딸, 좋은 학생, 좋은 친구이고자 노력했던 지난날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무엇인지, 열정을 느끼는 것은 무엇이며 내 옆에 어떤 사람을 두었을 때 가장 행복할지에 집중하여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정의하여 실천해 나가는 삼십 대를 보내고 싶다.


이십 대를 보내면서 스스로가 미워질 때마다 같은 내 모습으로부터 되려 예쁜 모습을 발견해 준 주변 사람들에게 심심한 감사 인사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아직 스물여덟 살이기 때문에 2년이나 이른 소망이지만 나의 삼십 대는 지금보다 덜 혼란스럽고 훨씬 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길 간절히 바라본다.

항상 훌륭한 취향과 흥미로운 대화 주제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LA Broad Museum에서 마주한 마음에 들었던 현대미술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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