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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루바 Oct 23. 2024

[루앙프라방] 다정한 고도(古都)

라오스 여행기 2.

비엔티안에서 루앙프라방에 이르는 방법엔 크게 미니밴, 버스, 기차가 있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지만 소요시간은 차원이 다르다. 국토 대부분이 산간 지방인 라오스는 아직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네 바퀴 달린 이동 수단으로는 빨라야 8시간, 일반적으로 12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아마도 굉장히 와일드한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기차를 타자니 예매 대행 값이 무척 비쌌다. 약 50~60만낍. 그래서 직접 예매를 시도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33만낍 정가로 예약에 성공했다. 덤으로 B에게 대단하다는 칭찬까지 받았으니 꽤 남는 장사였다.

 중국 자본의 도움으로 3년 전 설비된 철도와 기차는 때묻은 배낭을 싣기 미안할 정도로 매우 쾌적했다. 차창 밖의 풍경은 마치 초록과 파랑으로 이루어진 국기가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다. 뜨문뜨문 나타나는 무채색의 민가와 급할 건 하나도 없다는 듯이 풀을 뜯는 황소들을 지나친 것만 빼면. 루앙프라방 역은 불도(佛都)에 걸맞게 거대한 사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14세기 란쌍 왕국의 첫 수도이자 라오스 불교의 중심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라오스에도 눈이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메콩강이 흐르고 매일 새벽이면 탁발 의식이 신성히 이루어지는 곳.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를 난 어떻게 지나치게 될까.

해저물녘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싸바이 디!!!" 독특한 억양과 우렁찬 목소리의 마담은 친절과 불친절의 경계에 서 있었다. 어쨌든 카리스마는 끝내주는 마담이었다. 숙소의 규칙을 설명 받고 키를 건네받는데 마치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짐을 대충 풀고 식당을 찾아 거리로 나서는데 어라? 간판이 똑같다. 게스트하우스건, 식당이건, 동네 구멍가게건 어딜 봐도 같은 양식과 폰트를 사용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하긴 이런 제한이 없다면 자본의 침투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어댈지 모르는 일이다. 신호등도 없고 대형 관광버스의 진입도 금지되어 있는 곳이니, 당연히 스타벅스도 세븐일레븐도 없다. 하지만 가로등은 조금 더 설치하면 어떨까 싶다. 어둡고 고요한 밤거리를 걷는 것도 좋지만 말이다.

 카리스마 마담의 숙소엔 수영장 대신 아담하고 예쁜 정원과 무료로 커피와 차를 즐길 수 있는 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건 무척 상쾌한 일이었다. "싸바이 디!!!" 언제건 리셉션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인사도 몽롱한 아침을 깨우는 데 제격이다. 하나를 물어보면 열을 알려주는 수다쟁이 마담도 알고 보면 마음속 예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일 것이다. 고목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카놈!' 이라며 코코넛 과자를 주고 간다. 하나를 주고 가더니 돌아와서 하나를 더 준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는지 멋진 베레모와 체크 남방을 땀으로 적신 아저씨가 덥지 않으냐고 머리 위 팬을 틀자고 한다. 그리고 침묵 속 다정함이 오가는 아담한 홀. 루앙프라방, 첫날부터 좋은 예감이 든다.

카리스마 마담의 게스트하우스 홀.

예감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작가는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고 '정말 강한 사람은 놀랄만한 다정함과, 놀랄만한 부드러움을 갖고 있다.'고 썼는데 나에게 루앙프라방이 딱 그렇다. 시내를 둘러보기엔 자전거면 충분한 이곳은 스쿠터를 빌릴 필요도 없다. 더위에 강하다면 두 발만으로도 충분하다. 몇 만 명도 살지 않는, 가끔은 여행객이 현지인보다 많아 보일 정도로 작은 도시니까 말이다.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사찰을 굳이 돌아볼 생각이 없더라도 눈에 밟혀(또는 시간이 남아) 한 곳쯤은 들러볼지도 모른다. 여행자 거리가 수많은 사원이 이어지는 거리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시장이 들어서는 거리도 이곳이니 승려건, 주민이건, 여행자건 이 거리가 메인 스트리트라 할 만하다. 보트 드라이버들은 강변에서 하루를 보내므로 예외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면 '루앙프라방 국립박물관'을 들러보길 권하고 싶다. 이유는 현 도시 이름(최초의 도시 이름은 '시엥 동 시엥 텅'이었다)의 어원이 된 '프라방' 불상을 보관하고 있는 '호 프라방'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프라방 불상은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히 여겨지는 불상이고, 루앙은 도시를 의미하니 루앙프라방은 말 그대로 프라방의 도시라는 것을 공고히 하고 있는 셈이다. 란쌍 왕국 건국 당시, 파응움 왕이 선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 초 왕궁으로 건설된 현 박물관은 프랑스 보호령 시절부터 1975년 라오스 국가 해방의 날까지 비교적 최근의 짧은 역사를 담고 있지만, 비극적(왕족의 입장에서)인 왕정의 최후와 상반되는 화려한 유물들을 감상하며 유구한 왕국의 세월을 느껴보기에 적절하다. 시사방 봉 왕의 동상 뒤 건물은 현재 루앙프라방의 각종 공연이 이루어지는 문화센터가 되었으니 이 또한 시간의 힘이다. 공원처럼 넓은 광장엔 그늘 아래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많으니, 의자에 잠시 몸을 맡기고 시간의 태엽을 이리저리 감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적극적이고 와일드한 사찰 투어를 원한다면, 'Phou Si'에 올라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Phou'는 라오어로 산을 의미하니 번역하자면 'Si 산'인 셈인데, 산이라기엔 작은 언덕 정도이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멋들어진 녹음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불상들을 지나치다 보면 정상에 이른다. 정상엔 황금 사리탑이 우뚝 서 있고, 언제 봐도 불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이건 좀 폭력적이지 않은가'라 느껴지는 참새를 판매하는 노점상이 있다. 정확히는 참새의 소유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참새를 방생할 수 있는 기회를 판매하는 것인데, 방생되는 참새의 수만큼 노점상은 또 참새를 잡을 것이니 돈을 내고 다른 참새의 자유를 억압하는 셈이 된다. 심지어 방생된 참새가 다시 잡히게 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어쨌든 황금 사리탑 너머 펼쳐지는 불도의 전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노점상이 참새를 굶겨 죽이진 않을 테니 참새가 하루빨리 새장을 벗어나 이 장관 사이로 날아다닐 자유를 얻길 바란다.) 메콩강과 그로부터 뻗어 나와 도시를 휘감는 남칸강, 사찰의 그것과 유사한 빨간 지붕의 마을은 통일성을 뚜렷이 하며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그 사이 정치체제와 경제구조가 어떻게 변하든 종교의 역사와 전통을 더욱 굳건히 지키고 있음을, 이곳이 진정한 불도임을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내려오는 길, 펄럭이는 사찰의 오렌지색 승려복도 프라방 불상만큼이나 신성해 보였다.

루앙프라방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인 탁발 의식에 참여해 이 도시의 저변에 지하수처럼 깔려 있는 불심에 기대어보기도 했다. 비록 눈 깜짝할 새에 끝나버렸지만, 하루키의 말대로 수백 년 이어져왔을 토착의 힘을 느껴볼 수 있었다. 사실 '시엥 텅 사원'에 들렀을 때 탁발 의식에 대한 주의사항을 세심히 읽고는 '의식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인 경우에만 행하여 달라'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주지승부터 동자승으로 이어지는 맨발의 행렬을 멀찌감치 따라 걸어보기도 했다. 탁발 의식을 보기 위해서 특정 장소를 점찍어둘 필요는 없다. 새벽에 숙소를 나서면 진즉에 나와 승려께 시주할 찰밥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거리 곳곳에 서 있으므로,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사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승려들이 한 시간이 넘게 마을의 모든 길을 오고 가기 때문에 의자가 마련된 곳에서 신발을 벗고 경건히 앉아 찰밥을 들고 기다리면 된다. 오히려 사원 쪽으로 가면 '탁발 체험'을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이 무척 많다. 그리고 모두가 탁발 의식에 대한 주의사항을 읽고 오는 것은 아닌지 인증샷이 중요한 관광객들과 시끄러운 가이드, 승려들의 행렬에 바짝 붙어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아 눈살을 찌푸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부터 도시의 주요한 전통에 참여해 '어쨌거나 시주'를 하는 마음은 일부 존경하지만, 잠시 카메라를 내려두고 존경을 표함과 동시에 신앙의 힘을 느껴봄이 어떨까. 사실 루앙프라방에서는 찰밥도 새벽의 길거리 상인이 아닌 시장에서 미리 준비해둘 것을 권고하지만, 나에게는 대나무 찰밥통이 없어 선택지가 없었다. 새벽 상인에게 찰밥 1kg과 과자 한 묶음ㅡ완전히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닌 동자승들에게는 과자를 주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니 합리적이고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다ㅡ을 5만낍 주고 샀다. 내 옆에 앉았던 할머니께서는 분명히 방금 지었을 따끈한 찰밥을 한 솥을 가져오셨다. 새벽부터 한 솥의 밥을 지어 탁발에 나서는 할머니는 밥에, 밥을 쥐는 손에 어떤 마음을 담을까.

시주를 마치고 한결 뿌듯하고 이 도시에 조금은 동화된 마음으로 이리저리 골목을 도는데 대단한 광경을 봤다. 추레한 차림의 한 소녀가 대나무 밥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시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승려에게 되려 시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은 탁발 의식 중에 스님으로부터 스님이 받은 것을 나누어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켠이 죄송스러울 소녀의 마음은 한 솥의 찰밥을 들고 오신 할머니께서 넉넉히 채워줄 테고, 그것이야말로 이 도시를 끝없이 순환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탁발을 마치고 새벽시장에 들렀다. 이번에도 길을 알아둘 필요는 없다. 탁발 의식은 신성하고 고요하게 이루어지니, 그 새벽부터 소란스러운 곳은 시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상인들은 온갖 것들을 판매한다. 탁발 직후엔 관광객들의 수도 엄청나므로 말 그대로 인파 속에 갇히게 되니, 원하는 것이 보이면 망설여선 안 될 정도다. 이곳은 눈이 매울 지경으로 사테를 구워대고, 메콩강을 떠돌던 생선들이 발가벗겨지며, 과일 주스와 채소가 나뒹굴고, 국수나 죽 종류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끓이고, 서슬 퍼런 칼로 눈앞에서 쾅쾅 정육을 하는, 젖 먹일 시간도 부족한 처자가 아기를 데려와 한켠에서 젖을 먹이는 시장의 삼라만상이다. 10시면 파장하는 이 새벽을 여는 시장에서 노상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비늘을 벗기며 시작되는 생선 손질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기도 하고, 딸이 바닥에서 잘 도려낸 오렌지를 받아 주스를 만드는 엄마도 보았다. 들개들은 뭔가를 사진 않지만, 버려진 것들 중 먹을 수 있는 건 얼씨구 좋다고 먹어 치운다. 돈을 배제하고 순환하는 아름다움을 본다. 10시가 되면 나도 커피를 비우고, 여행을 계속하러 간다. 조금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자전거를 타던 중 우연히 들른 강변의 '다다 카페'엔 꽤 자주 들렀다. 수박 주스의 맛이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사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일품이었기 때문이고, 한국인을 좋아한다는 친절한 직원이 항상 '안녕, 브라더!'하고 맞아주었기 때문도 있다. 커피 맛도 잘 표현할 순 없지만 좋은 편이다. 다다 카페 맞은편엔 이 동네의 강변이 모두 그렇듯 보트 드라이버들이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Boat trip. 1hour. Good price." 그렇게 암카(?) 아저씨와 처음 만났다. 끝없이 달라붙는 호객꾼들과는 다르게 암카 아저씨는 며칠에 걸쳐 은근하게 스며드는 호객 스킬을 구사했는데, 그래서 언젠가 꼭 아저씨의 보트를 타야겠다는 의무감까지 들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길을 걷다 또 마주친ㅡ루앙프라방에서 아저씨와 마주친 건 5번이 넘을 것이다ㅡ아저씨가 보트 탑승을 권했다. 너무 더운 날이었던지라 "It's so hot. Sunny day."했더니 내 보트엔 루프가 있다고 "노 프라블람"이라던 아저씨 보트에 드디어 타게 되었다. 1960년생의, 28년이 된 보트는 중국제가 아닌 일제라고 자부하던, 세금을 계산하는 일을 하다가 보트 드라이버가 됐다는, 손 닿는 거리에서 메콩강을 그렇게 몇 번이고 돌고 돌았을, 내 나이의 아들이 있다는 아저씨. 1960년생의 우리 아버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던 멋진 항해였다. 물론 멋진 항해에는 라오 비어 2병도 기여했다. 다음엔 맥주 2병을 들고 우리 아버지와 꼭 보트를 타야지. 우리가 하노이로 떠난다고 하니 아저씨는 "너흰 젊으니까, 라오스 산악지대의 풍경은 멋져, 호치민의 무덤을 가봐"라고 별로 상관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멀어지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음에 또 보자"고 했다.

꽝시 폭포에 다녀온 날 외에는 거의 동일한 하루를 보냈다. 강변을 뛰거나 자전거를 타고, 늦은 아침을 먹고 카페에 들르거나 사원 내지 박물관 등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야시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식당과 메뉴, 대화 주제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같이 여행자 거리를 서성이다 '뮤(Mew)와 뷰(Bew)의 그림가게'를 마주했다. 루앙프라방에 있는 동안 맑스를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공급 과잉의 찬란한 자본주의 시대에 거리로 아이들을 내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소 개인으로서는 복잡한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이틀 전엔 야시장에서 찢어진 씬(라오스 전통치마) 때문에 종아리가 다 드러난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꼬마가 구걸을 했고, 어젠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세 살배기가 고사리 손으로 3을 표시하며 3만낍에 바나나 한 덩이를 팔고 있었다. 꼬마는 내가 망설이던 찰나 떠나버렸고 아기가 팔던 바나나를 나는 덜컥 사 먹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바나나를 내놓은 소년 소녀들의 수는 못해도 열을 넘었다. 3만낍을 주고 산 바나나는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겠지만 그 안에 담긴 작은 따스함이 전해지길, 또 이 도시와 지구에 그런 것들이 가득 차길 바라본다. 


뮤와 뷰는 자매다. 뮤는 열세 살, 뷰는 열 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인지 영어를 정말 잘한다. 뮤와 뷰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파란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8시까지 엽서 크기의 종이에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판매한다. 한 장에 2만낍, 5장을 사면 "Get 1 Free"란다. 이 똘똘한 자매들은 그림 실력은 별로지만, 사업 수완은 좋다. 뷰는 아직 부끄럼이 많아서 언니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데 손님이 말을 걸면 직접 대답하게 하고, 뷰를 혼자 두기도 하는 것이다. 한번은 맞은편 카페에서 자매를 봤는데 손님이 없을 때면 유튜브를 보다가 자동차에 비친 자신들을 보면서 춤도 춘다. 그걸 훔쳐보며 그래, 아직 꼬맹이일 뿐인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혼다 클릭을 나보다도 능숙하게 타는 뮤지만 고작 열세 살일 뿐이다. 나와 B는 하나씩 그림 두 장을 샀다. 그게 고마웠는지 그 앞을 지날 때면 먼저 손을 흔드는 게 참 예뻤다. 라오스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한 한 교수님은 여행 배낭에 항상 바리깡과 물풍선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아이들을 만났을 때 자기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란다. 루앙프라방에 정착한 한 식당의 한국인 부부는 피아노 센터를 열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지역 대학 야구부를 창설해 지원한다고 한다. 나의 배낭엔 무엇을 담고, 나의 두 손으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다정한 고도(古都)에서, 강한 신앙을 가진 불도(佛都)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다정하고 강한 사람들을 만났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이 여행기를 남긴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 '하루키'의 라오스 여행기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라오스엔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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